▲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당신은 잘 준비되어 있습니까? ⓒ 바이블파워


2006년 새해가 밝았다. 그 어느 때보다도 주님의 재림이 가까워진 지금, 갈수록 악해만 가는 시대의 징조들은 그것을 더욱 앞당기는 듯하다.


한참 “휴거파”가 소동을 부리던 1992년 초였다. 휴거파는 휴거파대로 때가 얼마 남지 않음을 전파하고 있었고, 그것을 반대하던 사람들은 비판을 하면서도 ‘혹시나’ 하고 있던 중, 한 세미나에 참석한 일이 있다. 그 세미나를 인도하고 있던 목사는 꽤 경건한 무천년주의자였는데, 강의를 하다가 이런 말을 하게 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92년 10월 28일에 예수님이 오신다고들 하는데, 우리는 지금이라도 바로 예수님이 오실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참석했던 모든 사람들은 그의 말에 “아멘”했다. 그 말은 휴거파의 잘못된 믿음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것처럼 보였다. 참으로 예수님은 인간들이 정해 놓은 날에 맞춰 오셔야 할 아무 이유도 없으며,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그분의 정해 놓은 시간에 오실 것이다. 하지만 그 목사와 거기 모인 사람들은 단순히 휴거파를 반대하기 위해서 그렇게 말하고 그 말에 ‘아멘’으로 반응했을 뿐, 아무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금이라도 당장 오실 수 있다고 믿지 않았다. 그들 중 아무도 그리스도의 재림을 사모하고 있지 않았으며, 그들 중 아무도 그 일을 믿지도 않았다.


우리는 수시로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이 시대에 가장 중요하게 말해고 가르치고 다루어져야 할 주제는 그리스도의 재림이다. 주님이 오실 때가 너무나도 가까이 왔기 떄문에 우리는 임박한 이 일을 대비하고, 또 소망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소망은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의 신앙에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믿음이다. 재림을 소망하지 않는다면 그는 결코 성경대로 믿는 사람이라 불릴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참으로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고 있는 것인가? 혹시 말로만 그분의 재림을 기다린다고 하는 것은 아닌가? 휴거와 재림에 대한 설교가 항상 우리 가운데 선포되었기에, 이제는 그 일에 만성이 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사모하는 사람들은 “의의 면류관”을 받는다고 말씀하고 있다(딤후 4:8). 적어도 그리스도의 심판석을 믿는 사람은 그 자리에서 주시는 면류관들을 기대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심판석이 어떻게 펼쳐질지, 어떤 사람들이 면류관들을 받을지 아는 것과 내가 그 면류관들을 받는 것과는 전혀 별개의 일이다.
많은 사람들은 구원을 받았다고 자신하지만, 그날에 지옥에 가 있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행한 일들로 면류관들을 기다리지만, 그날에 자기가 생각했던 면류관을 받지 못할 사람이 많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재림을 소망한다고 하기 때문에 이 “의의 면류관”을 기대하고 있겠지만,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그날 그 면류관을 놓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입으로만 그리스도의 재림을 사모했지, 참으로 그분의 재림을 기다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디모데후서 4장은 주께서 다시 오심을 사모하는 사람들에게 의의 면류관이 주어진다고 말함과 동시에(딤후 4:8),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킨” 사람들에게 이 면류관이 주어진다고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주님의 재림을 사모하되, 말로만 사모하는 것이 아니라,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키는 가운데 주님의 재림을 사모하는 사람들에게 이 면류관은 주어진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재림을 사모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그 행위로 그의 믿음을 증명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심판석은 우리의 행위에 따라 심판받는 자리이기 때문이다(고후 5:10). 만약 우리가 그분의 재림을 간절히 사모한다면, 우리는 지금 사는 것처럼 살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세상을 사랑하지 않을 것이며, 그리스도의 일을 더 열심히 할 것이며, 나에게 닥친 영적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서 안간힘을 쓸 것이다.
주님의 재림을 사모하는 사람들은 지금 당장이라도 주님이 오시기를 기다리는 사람이다. 금년에 주님이 오실 수 있다거나 이번 달에 주님이 오실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라, 바로 오늘, 바로 지금 주님이 오시기를 기다리는 사람이다. “오실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참으로 그분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당연히 오실 수 있는 분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진정으로 바라야 할 것이 있다면, 지금이라도 바로 주님이 오시기를 바라는 것이다. 만약 우리의 삶이 “바로 오늘, 바로 지금” 주님이 오시기를 바란다면 우리의 삶은 더 진지해질 수밖에 없다. 우리는 한 순간 한 순간도 헛되이 살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들은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펼쳐질 일들에 직결되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의 삶이 “바로 오늘, 바로 지금” 주님이 오시기를 소망하는 삶이라면, 우리는 더 이상 세상을 사랑할 여유가 없다. 세상적인 가치관을 갖지도 않는다. 세상에서의 안락과 평안을 바라지도 않는다. 참으로 먹을 것과 입을 것만 있어도 만족할 만한 삶, 그런 육신적인 필요들에 연연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주신 기회들을 붙잡아 그리스도를 위해 더 열심히 싸우는 삶, 때가 가까이 왔으므로 주님의 뜻을 더 분별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더 사랑하고 말씀을 공부하는 삶, 이것이 그분을 소망하는 삶이다. 이것은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는 삶이다(딤전 6:12). 좌우로 눈을 돌리지 말고 오직 목표만을 향해서 나아가야 하는 삶이다(빌 3:14). 세상을 사랑해서도 안 되고, 세상에게 인정을 받으려 해도 안 되고, 세상적인 생각과 판단으로 살아도 안 된다.
주께서 오실 때가 참으로 가까이 왔다고 믿는 사람과 그렇게 믿지 않는 사람이 갖고 있는 생활 방식은 다를 수밖에 없다. 이것은 단순하게 그가 무엇을 믿고 어떤 것에 더 큰 가치를 부여하고 있느냐 하는 가치관의 차이 정도로 한정시키면 안 된다. 왜냐하면 주님이 오시는 때는 참으로 가까이 왔기 때문이다. 그 날은 우리의 문 앞에 이르렀다.


어느 시대에나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그분의 재림을 외쳐왔다. 그러나 주님께서 다시 오마 하고 가신지 2000년이 되도록 우리 믿음의 선배들과 우리 또한 그분의 다시 오심을 외치고 있지만 아직 주님은 오시지 않고 있다. 2000년이라는 기간은 참으로 긴 기간이다. 하지만 역사상 어느 때에도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처럼 주님이 오실 징조가 명확한 적은 없었다. 우리는 참으로 거의 끝에 와 있다. 도표로 그린다면 마지막 1mm를 남겨 놓고 있는 것과 같다.


마태복음 20장에서 주님이 포도원의 비유를 말씀해 주셨을 때, 어떤 사람들은 아침 일찍 포도원에 와서 일하고, 어떤 사람들은 제 삼시 경에 어떤 사람들은 제 육시와 제 구시 경에,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제 십일시 경에 포도원에 와서 일한다고 하셨을 때, 이것은 각 시대별로 주님의 일꾼으로 부름 받은 사람들을 말한다.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초림 때와 교회시대 초기 때 주님을 섬겼다. 어떤 사람들은 중세시대 때 박해를 견뎌가며 순교하며 주님을 섬겼다. 어떤 사람들은 위대한 복음의 시대에 선교의 대열에 동참하며 주님을 섬겼고, 이제 우리는 마지막 시대에 부름 받아 주님을 섬기고 있다. 이제 하루의 수고가 끝나고 일꾼들은 주인과 함께 계산을 할 때가 되었다. 지금 우리가 있는 이 시점은 제 십일시 경에 부름 받은 때도 아니고, 계산을 하기 직전의 때이다.


곧 주인이 부르실 것이다. “자, 그만. 하던 일을 멈추고 모두 모여라. 계산을 하자.” 언제 이렇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이 들릴지 모른다. 이미 시간은 다 됐다. 시간은 다 되었는데 주님은 아직 우리를 부르시지 않는다. 아마도 일을 조금 더 할 수 있는 1분의 시간이 더 주어졌는지도 모른다. 아니 그렇게 길지 않을 수도 있다. 30초밖에 안 남았을 수도 있다. 마치 축구 경기에서 전광판의 시계는 멈춰 있고, ‘루즈 타임’이 적용되고 있는 때와 같을 수도 있다. 심판이 언제 호각을 불 지 모른다. 긴장된 순간이다.


자, 일어나자, 이대로 앉아 있을 수는 없다. 우리는 주님을 위해서 얼마나 일을 해 놓았는가? 그분이 계산하실 때 내놓을 수 있을 만큼 일이 되어 있는가? 우리가 해 놓은 일이면 상 받기에 충분한가? 왜 우리는 세상의 일들과 나 자신을 위한 일에 있어서는 만족하지 못하고 더 많이 성취하기를 바라면서, 왜 주님의 일에 있어서는 그렇게도 빨리 만족해 버리는가?
자, 일어나자. 주인이 우리를 부르러 오시는 것이 저기 앞에 보인다. 한 단이라도 더 거두자. 이것이 마지막 기회다. 더 이상의 기회는 없다. 우리는 주님이 오늘 하루가 다가기 전에, 아니 지금 당장이라도 오시기를 간절히 소망해야 한다. 비록 내가 쌓아 놓은 단이 적더라도, 그래서 주님 앞에서 좀 책망을 받더라도 그것 때문에 주님이 늦게 와야 한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그럼에도 우리는 주님이 지금 당장이라도 오시기를 소망해야 한다. 단지 오늘도 오시지 않는다면, 비록 아쉽지만,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또 하나의 하루를 주님을 위해 신실하게 일할 기회로 삼아야 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