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두 날개로 날아오르는 건강한 교회 4~5’ 감상문
김애영
4, 5장은 의식개혁만이 내가 변할 수 있다는 피할 수 없는 조건과, 절대적 순종, 그리고 그리스도 중심으로 연결되는 부모와 자식 형제 같은 가족의 재형성과 좋은 관계를 맺으려면 사랑이 필수라는 것을 절실히 깨닫게 해주는 장이다. 읽으면 읽을수록 태산, 어려운 시험을 앞둔 수험생처럼 착잡하다. 그렇지만 지금 이 순간도 따끈따끈한 아랫목에서 궁댕이를 녹이는 것이 더 좋으니 그 큰 비전에 동참해서 주님의 제자로 군사로 세움 받을 수 있을까… 염려가 앞섬을 부인 할 수가 없다. 하지만 군사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 진다는 사실에 희망을 놓지 않으려 한다. 비록 지금은 내 안에 꼭꼭 숨어있던 사단의 정체가 드러나고 있을 뿐, 아무 변화도 되지 않는 것 같다. 그 정체는 이렇다. 깊이 베인 상처의 기억이 문득문득 되살아 나기 때문에 교회 생활에 있어 항상 피해 의식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교회 안에는 유대인이 있고, 이방인이 있으며, 할례인이 있고 무할례인이 있기 때문에 아무리 열심을 내고 그들 유대인과 같이는 될 수 없는 벽과 이질감을 느꼈다. 그리고 그로 인한 부작용은 항상 말로 인한 상처로 종지부를 찍는다. 유대인과 같은 위치에 근접이라도 하면 또 교회의 열심을 보이려 하면 미리 알아채고는 끄집어 내리기, 밟기, 누명 씌우기로 실족하게 하고 목사님의 눈과 귀를 가리며 자신의 허물은 철저히 폐쇄 시키며 사랑 아닌 사랑의 가면을 쓰고 위하는 척 속이며 노련한 기술로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 유대인의 권위와 위치를 고수하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절로 감탄이 나왔다. 그 결과는 성도들에게 의욕상실, 희망상실, 무기력, 좌절의 큰 후유증을 남겨주며 마귀에게 승리를 안겨줌으로 막을 내린다. 그러나 암세포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어느 새 내게까지 전이되어 그 무리와 닮은 꼴이 되어가고 있음을 알았을 땐 이미 노력해도 좋은 것을 내지 못하고 변화되지 않은 내 안에서는 예수의 향기란 찾아볼 수 없었다. 나는 더 이상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였다. 또한 인간관계에서도 쓴 맛을 보았다. 꾸밈없는 마음으로 정말 친해지고 싶고 참 좋아하는 자매가 있었는데 그 자매는 나와 같은 마음이 아니었다. 오히려 나를 험담하고 멸시하며 실수를 폭로하고 수군거렸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내 마음이 아무리 진실 되도 또 무슨 꼬투리가 잡히면 어쩌지 하는 마음에 관계를 원만하게 맺지 못하는 것 같고 대인 기피증도 조금 생긴 것 같다. 이 장을 읽으면서 얼마나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중요한지, 사람을 축복의 길로도 저주의 길로도 인도하는 ‘키’임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 관계가 꼬리의 꼬리를 물면 가족 관계는커녕 원수관계로 전락하는 것은 시간 문제인 것이 자명하다. 나는 바란다. 셀리더가 되는 과정을 통해 그 암세포가 뿌리 뽑히고 또 다른 나로 인한 피해자가 나오기 전에 가치관 변화 의식 개혁은 반드시 되어야 한다는 책임을 느낀다. 성령의 강한 기름 부으심을 통해 심령을 묶고 있는 악한 것들이 떠나가기를 예수이름으로 마귀에게 선포한다. 그리고 가족보다 더 귀한 피로 맺어진 가족이 있는 교회를 꿈꾸어 본다.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나를 향한 하나님의 꿈과 계획을 바라보며 먼저 실천할 것은 내 인생의 핸들을 주님께 맡기는 것임을 깨달았다. 그것이야 말로 주님을 참 주인으로 인정하는 것이며 편안하고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음을 알았다. 그리고 둘째는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세우기 위한 노력이다. 베드로전서 2장 9절에 ‘우리는 왕 같은 제사장’이라 한다.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하여 섬길 때 그리스도의 몸이 세워진다’라고 말하고 있다. 영혼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마음을 닮아야 한다. 더불어 신앙의 기초가 되는 중심 되는 그리스도, 말씀, 기도, 예배, 섬김, 증거, 교제, 순종하는 삶을 내 것으로 삼아야겠다. 사도바울의 고백처럼 ‘내가 산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고백하고 싶다. 그리고 나의 혈기 방자하고, 화 잘 내고, 속 좁고, 정욕적이고 교만함이 다시는 활기 치지 못하도록 십자가 위에 매달아 완전 결박되기를 원한다. 주님을 진정한 왕으로 모시자. 나를 만드시고, 피 값을 주고 나를 사신 주님을 삶의 우선 순위로 두자. 그러기 위해서는 ①집념의 제자 ②의의 면류관, 생명의 면류관을 향해 끝까지 달려가는 순수한 제자 ③자기를 부인하고 헌신하는 순종의 제자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D12 비전을 이룰 수 있다고 믿는다. 나에게도 이 비전이 부담이 아닌 축복으로 느껴지는 날이 오기를 소망한다. 그리고 김성곤 목사님처럼 나보다 더 탁월한 제자를 세우기 위한 최선의 마음도 내 인격 속에 꼭 갖추고 싶다. 아무리 탁월해도 나보다는 못해야지! 하는 욕심이 아닌 참 소망이 존경스럽다. 나도 이 마음으로 나아가야겠다. 그래야만 제자 훈련의 결론인 재생산이 성립될 것이다. 하나님의 비전에 사로잡힌 소수의 사람을 통해 세상이 변화 했듯이 나로 인해 그 비전이 계속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곧 내가 변화되지 않으면 세상이 변화 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왔다. 자녀의 신분과 권세를 회복하고 신분에 맞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것이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일 것이다. 하루 빨리 혈육의 가족만 생각하고 챙기는 이기심에서 탈피하고 싶다. 주안의 모든 형제자매를 참 가족으로 인식하고 사랑을 실천할 때 하나님 나라의 확장은 이루어질 것이다. 셀 생활의 6가지 요소를 다짐하며 ‘공동체, 양육, 상호책임, 리더십, 전도, 중심 되신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용납하고, 세워주고, 치유되고, 회복되어지는 그런 희망과 격려를 주는 관계 맺음의 교회가 될 수 있도록 기도하며 나아가야겠다. 나의 속의 것이 변화 되어 아름다운 말 교회의 덕을 세우는 말이 입에서 나오고 주님의 향기를 낼 수 있기를 간절히 원한다. 그리고 주님께 감사 드리기는 또 한가지의 깨달음이다. 언젠가 나는 하늘나라의 아름다운 예술인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그때는 어떤 그림을 그려야 할지 몰랐었는데 이제 조금 알 것 같다. 어떤 재료로 무엇을 어떻게 그려야 할지를… 그리고 하나님께 복종할 수 밖에 없는 나의 존재를… 주님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철저한 역광의 위치에 있어야 함을… 나는 고등학교 때 우연히 미술실 앞을 지나면서 보니 선배들이 손을 앞으로 쭉 뻗은 채 연필을 들고 한쪽 눈을 감은 채 십자 구도를 잡는 보습이 너무 멋있어 보여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좋아하는 분야는 데생과 투명 수채화였다. 데생은 한가지 재료로 여러 느낌의 선을 표현해 낼 수 있으며 가장 매력 있는 것은 역광의 존재다. 뒤에서 희미하게 비춰지는 빛을 부각시키면 시킬수록 형태가 선명하게 표현되고 실제로 존재하는 형태처럼 사실적으로 묘사되는 맛이 너무 좋았다. 그런데 나는 그렇게 중요한 역광의 중요함과 아름다움을 잊고 살아왔었다. 앞에 밝게 비춰져 내 자신이 나타나기 보다 뒤에 숨을 빛으로 주님을 더욱 영화롭게 만들어 드려야겠다는 다짐이 생겼다. 그리고 또한 주님을 향한 절대적 복종은… 주님은 화가이시고, 나는 도구이자 소재이기 때문이다. 전적으로 그림은 그리는 자의 마음대로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사물이 똑같이 보여도 자세히 그려야 할 것이 있고, 흐리게 그려야 할 것, 생략해야 할 것, 지워야 할 것이 있다. 그것들이 적절하게 조화를 이룰 때 좋은 작품이 탄생한다. 그 도화지 속의 소재들이 ‘왜 나를 흐리게 그리냐고, 왜 나를 생략했냐고 따질 수 없다. 그것은 그리는 이의 절대적 주권이며 그리는 이가 좋으면 그만인 것 임을 다시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그 형상을 닮은 나도 도화지를 꺼내어 본다. 흰 도화지도 그리스도시다. 그 위에 하나님 사랑과 형제 사랑으로 십자 구도를 잡고, 하나님을 주제로, 말씀은 재료로, 세련 된 선은 기도를 통해서, 물감에는 사랑이란 물을 찍어 더 투명하고 아름답게 그려보고 싶다. 지금은 비록 연필을 깎고 있는 단계이지만… 눈부신 비상을 꿈꾸면서 준비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