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두 날개로 날아오르는 건강한 교회 6~7’ 감상문
김애영
우리는 다시 초대 교회의 복음 운동에 관심을 갖고 임재와 능력 목적 체험을 통해 누룩처럼, 겨자씨처럼, 주님 전도 방법을 부활시켜 본질을 찾아야 함을 알게 해 준다. 나는 지금껏 복음의 감격과 기쁨을 맘껏 누리지 못하고 나누지도 못한 채 사탄의 권세와 능력을 깨뜨린 승리감도 제대로 맛보지 못했다. 그저 아는 복음에 머무르며 내 자신과 가족만 누리는 우물 안에 개구리였다. 만약 하나님께서 내게 이런 양육의 시간을 허락하시지 않았다면 자녀 된 자로써 권세와 능력을 누리지도 못한 채 세상의 노예 아닌 노예로 고생하며 끊임없이 찾아오는 마귀의 괴롭힘에 넘어져 패배할 수 밖에 없었을 나인데… 긍휼의 손을 펴사 회복할 기회를 주신 주님께 감사 드린다. 그리고 나를 가장 많은 회개의 생각으로 이끌어간 부분은 ‘순종’이라는 단어다. 예수님은 단지 ‘나를 따르라’ 하시면서 예수님 자신을 닮기 원하셨다. 그것은 내 자신의 생각과 주관을 버리고 순종함으로 얻어질 수 있다는 절대적인 조건이 주어져 있음을 깨달으면서 그림을 처음 그리던 때로 생각을 옮겨본다. 석고 데생을 그릴 때 가장 처음 접하는 석고는 기본 석고 3개 중 한 개인 ‘아그리파’ 다. 누구나 처음에는 그 석고부터 그려내야 하는데 100이면 99명은 아그리파가 아닌 자신의 얼굴을 그려놓는 재미있는 상황이 벌어진다. 그 상황 속에서 인간의 속성을 발견 할 수 있다. 사람은 누구나 객관적인 눈 보다는 주관적인 눈이 먼저 열린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모든 것을 사실이 아닌 자기 주관으로 생각하고 결정짓는다. 그리고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은 정작 잘못된 형태를 그려 놓았다는 사실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친구의 그림을 보고는 왜 자기 얼굴을 그려 놓았냐며 웃는 모습이다. 부끄럽게도 그 모습은 내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다. 아그리파를 똑같이 그려내기 위해서는 행하지 않으면 안 되는 작업이 시작 되야 하는데 그것은 계속 관심을 가지고 석고상을 관찰하면서 반복해서 팔이 떨어져라 그린 다음 선생님의 끊임없는 가르침에 의해 고쳐지고 수정 되어져야 한다. 이 노력이 없는 한 자기 고집이 수반 된 채, 제대로 형태를 보는 눈도, 똑같이 그려낼 수도 없다. 그리고 또 한가지는 그리는 형태가 맞는지 틀리는지 확인하면서 그려야 하는데 그 자리에 앉아서는 잘 찾아낼 수가 없다. 자리에서 일어나 각도와 조명에 입각하여 멀리서 바라보아야 찾을 수 있다. 나의 신앙도 말씀의 조명에 비춰져야만 하겠다 라는 생각도 가져본다. 이렇게 여러 가지 수고가 동반되어져야지만 그대로의 이미지를 표출해 낼 수가 있다. 또 가장 중요한 것은 선생님의 지적을 100% 따르는 것이다. 영적인 면에서 다시 생각해 보면 다른 사람을 볼 때, 그 사람의 허물과 죄를 볼 때, 그 사람의 좋은 행실을 볼 때, 그대로 보지 못하고 내 주관대로 생각하고 결정 내어 버리는 일이 얼마나 많이 있는가! 날마다 이런 오류를 범하면서도 그것이 잘못되었는지 인식조차 하지 못하고 살아간다. 그리고 그것을 고치려고 항상 가르치시고 기도해 주시는 성령님을 외면하고 그렇게 살아간다. 아니 성령님의 음성은커녕 인간의 육성으로 직접 말씀하시는 목사님의 말씀조차도 순종하지 못했음을 고백한다. 목사님의 말씀에도 내 고집과 생각을 고수하니 성령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한다는 것은 거짓말임이 들통난 셈이다. 나에게는 시간을 다시 돌려 놓고 싶을 만큼 안타까웠던 일이 3가지 있는데 그 중에 한가지는 목사님의 말씀을 듣지 않아서 낭패를 당했던 시간이 있었다. 그렇다. 성령님과 늘 교통하시고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시는 또 한 분, 목사님께 순종함이 기본이 되어야겠다. 하라면 하고 하지 말라면 하지 말고 가라면 가고 가지 말라면 가지 말고… 이렇게 기본적인 것 석고로 말하자면 기본 석고도 못 그려서야 어떻게 중형 석고, 대형 석고, 더 나아가 훌륭한 예술가가 될 수 있단 말인가! 기본부터 다시 시작하자. 우리에게 주신 능력과 권세가 반드시 내 안에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성경에 나오는 개미를 기억한다. 부지런함을 개미에게서 배우라고 가르치듯 모든 만물은 나의 깨달음의 대상이기도 할 것이다.
주님의 자녀에게는 전도의 은사, 가르치는 은사, 섬기는 은사가 있다. 새같이 높이 날아 전도 대상자를 찾는 능력, 모든 것을 자라게 하는 땅처럼 가르치는 은사, 모든 허물을 덮고 안아주는 바다같이 섬기는 은사, 이렇듯 주님의 능력 안에서는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새싹이 심겨져 있음을 확신한다. 그러므로 주님이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의 능력을 신뢰하며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겠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는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삶의 곳곳에서 경험하고 싶다. 그리고 NCD 8가지 질적 특성 중 필요 중심적 전도로 생명의 충격과 복음의 충격을 내가 받은 만큼 나눠줄 수 있는 참된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며 기도한다. 하지만 자꾸 자신이 없다. 왜냐하면 내 안에는 수정되어야 할 점이 너무 많이 있다는 것이다. 그 중 하나는 언제부턴가 나는 훈계를 좋아하지 않는 모습이 되어 있었다. 잠언 12:1절에 ‘훈계를 좋아하는 자는 지식을 좋아하나니 징계를 싫어하는 자는 짐승과 같으니라’ 하는 말씀이 떠오른다. 학창시절 나의 모습은 잘못된 것을 지적해 주는 사람에게 고마움을 느꼈고 또 적용할 수 있었기에 발전하고 성장할 수 있었는데 지금은 그렇지 못하는 것 같다. 가르치기만 좋아하고 가르침을 당하기 싫어하고 주변에서 얘기 해 줄 이도 없는 사람은 세가지 이유가 있다. 예수님처럼 완벽하던지, 얘기 해 줄만큼 사랑해주는 이가 없든지, 아니면 권면해줘도 들을 가망이 없는 사람이든지 말이다. 언뜻 보면 완벽해서 가장 높은 자리에 있고 행복할 것 같지만 그것은 슬픈 일이다. 그것은 더 이상 성장할 수 없고 삶이 수정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꾸지람을 듣는 위치에 있다는 것은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나는 가르침을 받을 때 기분이 나빠지기도 하고 시험에 들기도 한다. 나의 영원한 인류 선생님이신 예수님과 영적 어머니인 목사님의 말씀에 즐겁고 기쁜 순종으로 말미암아 영적 성장을 하여서 일류 신앙인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이 깨달음이 생각과 결심만으로 끝나지 않고 마른 뼈가 살이 붙고 생기가 들어간 것 같이 나에게도 그런 역사가 일어나기를 소원한다. 마른 뼈가 다시 일어서려면 영감 있는 예배를 드려야 한다. 사실 우리 교회는 말씀이 살아있는 교회, 맛이 있는 교회 성령께서 역동적으로 운행하시어 말씀을 들은 후 용기가 생기고 기쁨과 감동을 체험하는 예배를 드리는 교회 임이 틀림없다. 하지만 나는 예배를 생활 속에서 드리는 구체적인 행위, 즉 사랑의 고백의 시간으로 생각하지 못하고 성의 없게 예배를 드렸던 것 같다. 예배는 생명임을 깊이 깨달았다. 그렇기에 축제의 분위기 속에서 기쁨으로 송축하는 예배로 이끌고 복음 중심으로 변화를 촉구하고, 참 평안을 주고 또 용서와 일치와 이해로 그리고 사랑의 언어를 사용하는 것 두번 째로 회중이 동참하는 예배 곧 전심과 기쁨으로 찬양하는 모습은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통로, 세번 째로 시대에 맞는 커뮤니케이션을 하는 교회 이것이 21세기에 나아갸야 할 교회의 모습이라 한다. 이를 이루기 위해서는 목사님 혼자 만이 몫이 아님을 이미 알고 있다. 모세가 혼자 모든 일을 감당하기 때문에 능률적이지 못함이 이드로에 의해 지적됨으로 수정되어 분담해서 천부장 백부장 오십부장과 십부장을 세워 쉽게 일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했던 것 같이 지체가 모두 움직여 목사님을 도와 머리 되신 그리스도의 지체가 건강하게 활동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 일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우리 안에 주시고 바라시는 하나님의 뜻을 순종으로 감당하도록 노력해야겠다. 그리고 단순한 복음, 동질감이 느껴지는 교회 문화, 적극적인 자원 보완, 성령 중심의 사역, 참여하는 예배 자신의 은사대로 사역하는 헌신으로 교회 행사들이 진행 되도록 더욱 힘을 모아야겠다. 그것은 21세기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핵심은 영성, 감성, 체험이기 때문이다. 이에 따른 나의 무릎 꿇음의 시간은 더욱 강화 되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며 항상 기도로 준비하는 주님의 제자가 되기를 다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