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그 신복들이 저에게 고하되 우리가 들은즉 이스라엘 집의 왕들은 인자한 왕이라 하니 만일 우리가 굵은 베로 허리를 묶고
   테두리를 머리에 이고 이스라엘 왕에게로 나아가면 저가 혹시 왕의 생명을 살리리이다 하고
32저희가 굵은 베로 허리를 묶고 테두리를 머리에 이고 이스라엘 왕에게 이르러 가로되 왕의 종 벤하닷이 청하기를 나의 생
   명을 살려주옵소서 하더이다 아합이 가로되 저가 오히려 살았느냐 저는 나의 형제니라
33그 사람들이 징조로 여기고 그 말을 얼른 받아 대답하여 가로되 벤하닷은 왕의 형제니이다 왕이 가로되 너희는 가서 저를
   인도하여 오라 벤하닷이 이에 왕에게 나아오니 왕이 저를 병거에 올린지라
34벤하닷이 왕께 고하되 내 부친이 당신의 부친에게서 빼앗은 모든 성읍을 내가 돌려 보내리이다 또 나의 부친이 사마리아에
  서 만든 것 같이 당신도 다메섹에서 당신을 위하여 거리를 만드소서 아합이 가로되 내가 이 약조로 당신을 놓으리라 하고
  이에 더불어 약조하고 저를 놓았더라


  이스라엘에게 패한 벤하닷은 천신만고 끝에 목숨을 부지하고 아합에게 생명 살려주기를 청합니다. 아합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그를 나의 형제라고 말하고 선친 때에 사마리아 땅에서 잃었던 성읍 몇 개를 받는 약조로 그를 돌려보내는 모습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아합이 벤하닷에게 굴욕적인 일을 당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처단치 않고 하나님을 모욕한 자를 살려 돌려보는 것은 왜일까?
  아합은 벤하닷과의 동맹을 통해서 앗시리아의 세력을 견제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아합은 하나님의 능력을 몸소 체험했던 사람입니다. 결코 이길 수 없는 전쟁을 승리로 이끄신 전능하신 하나님을 전쟁을 주관자로 체험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아합은 자신과 이스라엘을 위기에서 구원 하나님이 아닌 원수 벤하닷을 자신의 힘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에 아합과 같은 모습은 없습니까? 힘들고 어려울 때 어찌할 바 모르는 파산의 위기 가운데서는 하나님께 도움을 구합니다만 정작 문제의 해결이 왔을 때는 더 이상 하나님은 나의 삶에 상관이 없다는 식으로 멀리하고 의뢰치도 않습니다. 이제 좀 숨을 쉴만하니  까 다시 자신의 삶의 방편대로 자신의 삶을 계획하고 전개해 갑니다.
  232인으로 10만이 넘는 군대를 이길 수 있는 것이 사람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아람을 이기신 하나님이 앗시리아를 이기시지 못하겠습니까?

  우리의 신앙이 하나님을 내 편의대로 이용하려는 행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은 내 문제의 해결의 방편으로 그때그때 존재할 뿐 내 생의 전부를 의탁하고 어느 상황에서나 하나님의 개입을 역사를 믿고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실 좋으신 아버지임을 믿고 섬기지를 못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은 전쟁의 주관자뿐 아니라 내 인생의 주관자 되십니다. 내 평생의 삶을 통하여 작은 일이 되었던 큰 일이 되었던 하나님을 의뢰하고 변함없이 모든 주권을 인정하며 사는 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아름다운 삶의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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