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11:28-30                                                                                                                          2006.4.2.주일오전예배
쉼을 주시는 예수님                                                                                                    동경한인장로교회 김용수목사

하덕규라는 가수가 부른 '가시나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
  내 속엔 헛된 바램들로    당신의 편할 곳 없네

  내 속엔 내가 어쩔 수 없는 어둠    당신의 쉴 자리를 뺏고
  내 속엔 내가 이길 수 없는 슬픔    무성한 가시나무 숲  같네

  바람만 불면 그 메마른 가지    서로 부대끼며   울어대고
  쉴 곳을 찾아 지쳐 날아온      어린 새들도 가시에 찔려 날아가고
  바람만 불면 외롭고 또 괴로워    슬픈 노래를 부르던 날이 많았는데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서    당신의 쉴 곳 없네

  오늘날은 과거 어느 때보다도 물질적인 풍요와 짧은 노동시간, 다양한 레져와 스포츠, 각종 문명의 발달들로 인해 고된 육체노동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편리한 세상이 되었습니다.
  이런 과학의 발달과 물질의 풍요로운 세상이 될수록 사람들은 더 편하고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마음에는 쉼이 없고 오히려 스트레스, 노이로제, 우울증 등 각종 정신질환으로 고통 하는 사람들이 늘어만 가고 있습니다.
  현대인들은 타이트한 조직사회 속에서 마치 기계의 부속품처럼 같은 일을 반복하며 무의미한 인생을 살다보니 마음에 피곤이 쌓여만 갑니다.
  또 치열한 경쟁사회 속에서 항상 긴장된 생활을 해야 하기 때문에 마음은 불안하고 여유가 없습니다. 이 시대는 한마디로 쉼이 없는 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 불안하고 피곤한 세상에서 참된 쉼을 얻을 수 있습니까?

  현대인들에게 ‘피곤’이라는 말은 어느 시대보다도 거인처럼 다가오는 말입니다. 이 피곤의 문제는 더 이상 특정한 개인의 문제는 아닙니다. 전쟁과도 같은 하루 일과 속에서 업무량은 늘어만 가고, 현대인들은 초를 다투며 살아갑니다.
  이렇게 스트레스의 융단폭격을 맞으며 살다 보면 무력증이 찾아오고, 의욕이 상실되면 결국은 "내 인생이 실패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염려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이 피곤으로 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려움을 당하는 피곤을 꼭 육신적인 피곤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피곤은 정신적인 것이요 더 깊이 들어가면 영적인 것입니다.
  피곤을 나쁘다고만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한정된 힘을 가지고 있고 연약한 육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과부하가 걸리면 피곤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피곤은 악한 것, 이상한 것이 아니라 인생의 운명이요 숙명입니다.

막6:31 - 이르시되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와서 잠간 쉬어라 하시니 이는 오고 가는 사람이 많아 음식 먹을 겨를도 없음이라
예수님은 우리에게 쉼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사실을 아시며 우리를 위하여 쉼의 때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지만 우리는 예수님에 대해 일만 많이 시키는 혹독한 고용주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할 때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지 않으면 이상하게 죄책감과 두려움을 느끼곤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실 때부터 안식일을 제정하시고 쉼을 명하신 분이심을 명심하십시오.
예수님은 조용한 곳으로 물러나게 하시고 영육간에 재충전의 시간을 가지도록 권고하고 계십니다.
  일을 너무 하지 않는 것도 문제이지만 너무 많이 해서 정작 일 해야 할 때 지쳐 뒤로 물러가는 것은 더 큰 문제입니다.
쉼과 일의 적절한 조화를 필요로 합니다.

  현대인들은 무척 바쁘게 살아갑니다. 어린이들도 바쁘다고 하소연합니다. 오죽하면 외국인들도 ‘빨리 빨리’는 잘 알아듣는다고 합니다. 바쁜 현대인들에게 쉼을 말하면 현실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일지도 모릅니다.
  주5일 근무제가 무언으로 많은 것을 말합니다. 쉼을 위해 더 많은 시간을 가지지만 갈수록 더 갈급한 마음은 숨길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쉼을 주시는 것은 단순히‘논다’라는 의미만은 아닙니다. 쉼은 힘껏 일해오다가 다시 새롭게 일하기 위한 ‘중간, 사이’를 말합니다. 따라서 쉼은 영육의 재창조를 위한 되새김의 시간입니다.


예수님의 주시는 쉼은?

  첫째로, 예수님께 나아갈 때 얻는 쉼입니다.(11절 중)-다 내게로 오라
우리는 주님의 초청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순종하여 주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모든 무거운 죄짐들을 그 앞에 내려놓아야 합니다. 믿음으로 그 모습 그대로 나아갈 때 주님은 정죄치 않으시고 용서하시며 내면의 평안함과 기쁨을 주십니다.
  우리는 주님의 초청에 내가 무엇인가 정결하게 하거나,
                       무엇인가 의로운 행위를 하거나
                       무엇인가 온전하게 해 놓고 나아가도 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모습 그대로 나오기를 원하십니다. 연약하고 추하고 못난 모습 그대로 나아오기를 바라십니다.

  반면, 또한 사람들은 저마다 내가 세상에서 가장 수고를 많이 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기의 처지가 가장 비참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나만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것이 아닙니다.
  모든 인류가 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떠난 죄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데서 벗어날 수 있습니까?
  사람들은 이를 위해서 어떤 노력을 합니까?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피곤하고 스트레스가 쌓이면 무조건 자고 봅니다.
  어떤 사람은 만화나 무협지를 보면서 무거운 짐에서 벗어나고자 합니다. 오락실을 찾아가기도 하고 노래방, 전화방, 비디오방, 춤방 같은 곳에 가서 스트레스를 풉니다.
  어떤 사람들은 쉼을 얻기 위하여 고상한 음악을 듣기도 하고 열심히 운동을 하기도 합니다.
  주말에는 차를 몰고 교회를 떠나 교외로 갑니다.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술을 먹고 고성방가를 지르기도 합니다.
  때론 지나가는 개를 걷어차지만 개가 다시돌아와 물어 스트레스가 더 쌓입니다.
  져야 할 짐이 너무 무거워 자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렇게 사람들은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쉼을 얻고자 하는 과정에서 죄를 짓고 죄짐으로 인해 오히려 피곤한 인생을 살아갑니다.

  일본의 심리학자 하루야마 시게오씨는 그의 저서 '뇌의 혁명'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사람이 스트레스를 받으면 뇌에 미움과 증오의 정서를 강화시키는 '노드아드레날린'이 분비된다. 이를 중화시키기 위해서는 어떤 강력한 자극을 통해 분출을 해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폭력과 음란 등 쾌락인 것이다."
  그런데 쾌락의 끝에는 반드시 권태에 맞부딪치게 되기 때문에 사람은 또 다른 형태의 쾌락을 찾아 반복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반복의 과정에서 쾌락의 아편은 점점 더 강도를 높여 가는 것입니다.
  이를 전문용어로는 '자극의 에스컬레이터 현상'이라고 합니다. 즉 에스컬레이터와 같이 끝없이 반복하여 강도 높은 쾌락을 추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결국, 사람들은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쉼을 얻고자 하다가 더 큰 죄를 짓고 이제는 헤어나올 수 없는 무거운 죄짐에 눌려 고통 하는 쉼 없는 방랑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인생들에게는 참된 쉼을 주는 영혼의 구원자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성 어거스틴은 마음에 평안을 얻기 위해서 고행도 하고 수많은 학문도 하였지만 마음에는 고뇌만이 더 쌓일 뿐이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휘파람을 불며 지나가는 거지의 행복한 모습을 보며 '나는 저 거지보다 더 불쌍하구나'하며 탄식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을 만났을 때 마침내 긴 방황에 종지부를 찍고 유명한 명제를 남겼습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는 참된 안식을 얻을 수 없다."
  사도 바울은 의롭게 살고자 몸부림을 쳤지만 어찌할 수 없는 죄짐에 눌려 이렇게 탄식했습니다.
롬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랴.
  이러한 그가 예수님께 나아갔을 때 그는 진정한 해방감을 맛보고 이렇게 외쳤습니다.
롬8:1-2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그러므로 예수님 앞에 나아갈 때 진정한 쉼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습니다.
사40:31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      예수님에게 나와야만 합니다.


  둘째, 예수님의 멍에를 메는 데서 얻는 쉼입니다.(30절 중)-나의 멍에를 메고
예수님은 멍에를 벗겨 주신다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대신 주님은 멍에를 더 쉬운 것으로 갈아주신다고 합니다. 이 멍에를 우리가 메면 쉼을 얻을 수 있다고 하십니다.

여기서 멍에란 무거운 짐을 함께 끌 수 있도록 소나 말의 목에 가로 얹는 둥그렇게 구부러진 막대를 말합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멍에는 가볍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목수로서 가장 가벼운 멍에를 만드셨다고 합니다.
이 멍에가 소나 말에 적절하게 잘 맞으면 편하게 짐을 끌 수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그 멍에가 잘 맞지 않으면 고생은 고생대로 하면서 힘들게 짐을 끌어야 합니다.

인간은 세상과 사단이 주는 힘들고 부적절한 멍에를 메고 고생합니다. 그 가운데 인본적인 가치관이나 낡은 전통이나 관습이나 율법의 멍에라는 것이 있습니다.
  율법은 그 사람의 내면에 정죄의식을 심고 무기력하게 하고 자포자기하게 하고 절망하게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주시는 멍에는 각 사람에 알맞고 지기에 쉬운 멍에입니다. 그것은 은혜의 멍에요 진리의 멍에요 복음의 멍에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온유와 겸손과 같은 예수님의 성품이나 인격 자체입니다. 이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예수님을 지속적으로 배울 때 예수님과 연합된 한 몸이 됩니다.
  예수님은 온유하시고 겸손하시기 때문에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알맞게 섬기시고 사랑과 평화로 다스려 주십니다. 세상에서처럼 율법의 잣대로 자르고 정죄하는 대신에 나의 연약함을 감당하시고 끝까지 사랑하시고 책임져 주십니다. 그 영혼이 소생되고 그 인격이 건강하게 되고 예수님의 형상을 닮아가게 하십니다.


  셋째로, 예수님께 배우므로 얻는 쉼입니다.(29절 중)-내게 배우라
알기 위해서 배우는 것이 아닙니다. 배우라는 것은 ‘순종하라’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날마다 말씀을 묵상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순종하기 위해서 입니다.
우리가 주일마다 와서 예배 중에 말씀을 듣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 말씀대로 살기 위해서 입니다.
조금만 상황이 어려워지면 마음의 쉼이 몽땅 다 날아가고 안 믿는 사람들과 별 차이가 없는 반응을 보이는 것은 순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마음을 배워야합니다. 예수의 성품을 배워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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