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6:60-71                                                                                                                          2006.1.15.주일오전예배
너희도 가려느냐                                                                                                        동경한인장로교회 김용수목사

이 땅에서의 만남은 헤어짐을 전제로 한다고 합니다.
어떤 만남이 되었든지 헤어짐이 없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내 생명과도 같은 부모 자식의 관계 속에서도 헤어짐이 있다는 것입니다.
평생을 반려자로 살아온 사람과도 헤어짐이 있습니다. 언젠가는 모르지만 저도 집사람도 헤어져야만 합니다.
죽마고우로 마음을 나누며 지내왔던 친구와도 헤어짐의 자리를 피할 길은 없습니다.

목회를 하다보면 더 많은 헤어짐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될 일들이 참 많이 있었던 것을 바라보게 됩니다.
일본에서의 목회는 더더욱 많은 이별을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지난 7년의 세월동안 뼈에 사무치는 아픔을 통해 심장이 터지는 아픔을 통해 느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때론 이 아픔을 달래는 한 가닥 자위의 말로 "차라리 한국에 나간 사람을 데리고 한국에서 목회를 하면 더 좋겠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늘어놓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곳에는 헤어짐이 없을까? 물론 이곳에서의 상황과 같은 어쩔 수 없이 떠나야한다는 상황은 덜할지는 몰라도 그곳에서도 이미 준비된 이별들은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 아픔은 나만이 겪어야 했던 나만의 아픔이 아니었습니다.
주님께도 이 아픔을 이미 겪으셨던 것을 오늘 본문을 통해서 보게됩니다.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을 맞아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생업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던 시간적 여유는 그들의 발걸음을 예수께로 향할 수 있었고 그렇게 찾아오는 큰 무리를 주님은 자비가운데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으로 오천명을 먹이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게 됩니다.
다음날에도 무리들은 예수를 찾아 디베랴 광야까지 나왔지만 찾지 못하고 그곳에서 배를 타고 예수께서 계신 가버나움까지 오게됩니다.
이렇게 힘들게 찾아온 큰 무리의 중심을 주님은 꿰뚫어 보시고 긍휼히 보시며 한끼의 육신의 양식보다 더 중요한 영생하는 양식인 당신을 증거 하시면서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고 말씀하십니다.(요6:26-27)
하지만 많은 무리와 많은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 생명에 이르는 말(63절)을 해주자 모두 떠나는 것입니다.
그러자 주님은 남은 12제자를 향하여 "너희도 가려느냐"라고 묻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뼈에 사무친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고 남은 열두 제자에게 너희도 가려느냐 라고 묻는 물음의 의미를 통해 영생하는 양식을 찾는 믿음의 삶이 되길 바랍니다.

"너희도 가려느냐"는 물음은?

첫째, 제자들에게 묻는 말입니다.-이곳에 누가 있었습니까? 제자들만 있었습니까? 큰 무리(5절) 많은 회중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모든 무리가 다 떠나고 제자만 남았을 때 제자들에게 묻는 말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너희도 가려느냐는 말이 모든 회중들 앞에서 한다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무에게나 똑같은 말을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 목회가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닙니다. 제 머리 빠지는 것을 보면 모르시겠습니까?ㅎㅎ
주일에 한번 설교하면 아무 것도 할 일 없이 지내는 줄 생각합니다. 하지만 교인 하나하나의 사정과 형편에 맞는 말씀의 연구와 기도가 늘 필요한 것입니다. 성경에 있다하여 모든 것을 무작위로 말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 사람이 받을 수 있는 말을 해야 합니다. 또한 그런 상황이 주어질 때 해야합니다. 아무 때나 한다고 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제가 십일조 얘기나 주일 성수에 대해서 주일오전예배(대예배) 때 말을 합니까? 안 합니다. 그렇다고 하지 말아야할 얘기이기에 안 하는 겁니까? 당연히 해야할 말입니다. 그런데 당연하게 전 안합니다. 왜 안 합니까? 아직 그 말에 대하여 소화되지 못하는 회중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전혀 말하지 않습니까? 아닙니다. 말합니다. 누구에게 합니까? 십일조를 해야할 신앙을 갖은 사람인데 안 하는 사람에게만, 주일성수를 강조해도 될 사람에게만 개인적으로 말합니다. 지난 주일에 김숙락집사님, 이용범권찰님 안전도사님가정과 함께 저녁을 같이 먹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제가 그런 자릴 절대 놓치지 않죠.
삼겹살에 배도 불러서 1차적인 민생고가 해결된 상태에서 바로 공격으로 들어갔습니다. 십일조는 이런 것인데.. 이렇게 해야하는 것인데... 하며 구차한 설명이 필요없이 "이권찰 요즘 왜 십일조 안해?" 다짜고짜 따지고 들어갑니다. 십일조의 얘기로 시험들 사람이 아닌 것을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권찰은 오후5시 예배가 없어서 시험에 들 수는 있어도 십일조에 대해서는 시험에 들 사람이 아니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밤새도록 일을 하기에 잠을 충분히 자고 나서 예배하려고...)
(이제부터 저하고 개인적으로 식사하는 사람은 반듯이 그 전주에 십일조를 하고 식사를 같이 하는 것이 좋을 듯...ㅋㅋ)

주님께서도 무리 전체를 향해 너희도 가려느냐고 말하고 있지 않고 12제자에게만 말씀하십니다.
특별히 12제자에게 묻는 이 물음은 "너희가 제자인가 유월절 큰 무리(회중)인가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주의 제자인가?  유월절 회중, 곧 큰 무리중 하나인가?
  우리의 정체성은 무엇입니까?
누가 회중입니까?
  1.믿지 아니하는 자들입니다.(64절)-그러나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느니라 하시니
  2.자기를 팔자입니다.(64절 하)-자기를 팔 자가 누군지 처음부터 아심이러라
                            =아무리 가까이 있어도 제자가 아닌 회중입니다.
  3.보냄을 받지 아니한 자들입니다.(65절)-


둘째, 육신의 만족만을 생각하겠느냐는 말입니다.
         34절-저희가 가로되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35절-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  마르지 아니하리라
  예수님께서는 생명의 떡을 주겠다고 하시며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할 당신을 우리게 주시겠다고 하셨는데 무리는 육신의 떡만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신앙은 나 자신의 육의 만족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회가 물질만능주의로 가다보니까 교회의 생활도 물질 만능으로 바뀌고 있고 우리가 생각하고 바라는 축복도 물질에만 꽂혀있지 않습니까?  
  육신의 만족은 이 땅에 그 어디에서 그 무엇으로도 찾을 없는 것입니다만 그나마 찾는다면 세상에서 찾아야 할 것입니다.  
  신앙은 세상이 주는 만족을 포기하는 것에서 기인합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빌3:8)-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셋째, 너희의 생각대로 하겠느냐는 말입니다.(60절)-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떠나는 자신을 합리화하며 동정을 구하고 있는 말입니다.
  주님의 표현으로는 '걸림이 되는 말'(61절)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자기에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말들, 자신의 생각과 다르면 그것이 진리라도 소용없는 사람들입니다.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39절)이라고 소망하며 진리를 선포하지만 오직 진리는 자신의 생각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입니다.
  신앙의 첫걸음은 내 생각을 포기하는 데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전철을 타면 꼭 반대 방향으로 가는 것 같이 느끼곤 합니다. 내 생각이라는 것이 이렇게 방향감각조차도 믿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내 생각이 세상에서 제일 옳은 줄로 착각하고 살아가는 모습들을 보게됩니다.
  여러분, 신앙은 절대 내 생각대로 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생각에 맞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 생각에 이것이 아닌데 싶어도 주님의 말씀, 주님의 뜻이라면 그렇게 행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너희가 하나님께로서 부름 받지 않았느냐는 말입니다.(65절)-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오천 명을 먹였지만 오천 명이 구원된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주님이 구원될 자에게만 떡을 주신 것은 아닙니다.
  누구든지 당신 앞에 나와 있는 모든 이에게 지위고하 신분을 막론하고, 남녀노소 연령을 막론하고 모두에게 골고루 주셨습니다.
  아무리 주님이 주신 떡을 먹고 생선을 먹었다해도 거기에 구원이 머무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아무리 목사님의 사랑을 받고 주님의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하더라도 내가 아무리 많은 은혜를 받았다 하더라도 거기에 구원이 머물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소명입니다. 하나님께 부름 받은 자인 것을 믿고 그 바탕에 서있지 안으면 우리가 아무리 많은 은혜를 체험해도 소용없다는 것입니다.
  '내게 주신 은혜가 이렇게 크기에 나는 이렇게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너무 위험한 신앙의 발상입니다.
  이 논리대로 라고 한다면 내게 아무런 은혜가 오지 않을 때는 언제든지 떠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큰 무리가 주님을 떠나는 것도 이 상황 아닙니까? "야 어제까지만 해도 은혜가 됐는데 오늘 보니까 아니네"하고 다들 주님을 등진 체, 주의 가슴에 못을 박고 떠나는 것 아니냐는 것입니다.
  언제까지 은혜 따라다니며 내 기분에 충족을 위해 살겠습니까?
  우리의 소명은 은혜와는 상관없이 내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존재이기에 내 신분에 맞는 충성만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군인이 나라의 부름을 받고 갈 때 월급 몇 푼 준다는 것 때문에 거기에 자신의 젊음과 생명을 담보로 내어놓습니까? 저는 그나마 몇 천원의 월급도 받지 않고 도시락 싸들고 다니면서 충성했습니다. 왜 입니까? (방위였습니다.ㅎㅎ) 나라에 대한 고마움과 은혜에 상관없이 부름 받았기 때문입니다.
  받은 사랑대로 충성한다면 받은 은혜대로 충성한다면 동경한인장로교회 벌써 주앞에 봉헌하고도 남았습니다......
  제가 성도들을 향해서 쏟은 사랑만 하더라도(자랑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은 다 빼더라도 얼마나 많은 지요?
  그렇지만 다 떠났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남아 있습니까? 소명을 깨달은 자들입니다.
  은혜와 사랑과는 상관없이 자기가 하나님께 부름 받은 자인 것을 알아 그 부름에 합당하게 서있는 사람들만 남았습니다.

  우리 주님의 절규 앞에 진솔해 저야 합니다.
  내가 받은 은혜 때문에 충성하십니까? 내가 하나님께 받은 사랑이 너무 커서 열심이십니까?
  그 은혜와 사랑 때문에 물불 가리지 않고 새벽부터 저녁까지 그렇게 열심히 봉사하십니까?
  아닙니다.
  바로 보십시오.
  부름 받은 자 이기에 그분의 은혜와 사랑에 상관하지 않고 충성해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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