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주간 동안 평안하셨습니까?
인생의 삶에서 어려움이 없다면 인생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우리의 삶에서 어려움은 떼어 놓을래야 떼어 놓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러한 어려움을 이겨내기에 큰 힘이 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자신에게 닥치는 갖가지 시련을 이겨낼 수 있게 해주는 원동력으로는 무엇보다도 가족의 존재를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저도 힘겨운 사춘기를 보내야만 했었는데 그나마 그 시기를 무사히 넘길 수 있게 한 것은 저의 가족이었습니다. 제가 잘못된 길로 갔을 경우에 가족이 겪어야 만 할 괴로움과 슬픔을 생각하면 감히 탈선의 길로 들어설 수 없었던 것입니다. 몇 년 전 일본을 감동시켰던 유명한 실화가 하나 있습니다. 오래된 집의 해체를 위해서 벽을 뜯어내는 공사를 하던 중 벽 속에서 못에 박힌 도마뱀 한 마리가 발견된 사건입니다. 이 도마뱀은 무려 1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그 벽 안에서 움직이지도 못한 채 살아왔다고 밝혀졌습니다. 그렇다면 이 움직일 수 없는 도마뱀은 과연 무엇을 먹으면서 생명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요? 이 수컷 도마뱀을 먹여 살린 것은 다름아닌 암컷 도마뱀이었습니다. 이 두마리의 도마뱀이 결코 짧은 시간이라 할 수 없는 10년의 세월을 견뎌내며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가족의 존재에 대한 의지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본문에서 나오는 초대교회의 모습은 가장 이상적인 공동체로 설명됩니다. 이는 단순한 공동체이기 전에 믿음으로 하나되는 가족이었습니다. 가족으로서 서로 책임지고 보호하는 가족의 기능을 십분 활용했습니다. 그래서 핍박의 시기에서도 하나님의 교회는 아름다운 한 가족으로 보다 성장하면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어려운 환경에서도 하나님의 교회가 더 크게 부흥할 수 있었던 이유는 철저하게 가족되었던 틀이 무너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가장인 아버지가 열심히 일 한 댓가로 월급을 가족의 생활비로 내어놓으면서 댓가를 요구하는 경우를 보셨습니까? 이러한 아버지가 있다면 이 공동체는 더이상 가족이 아닐 것입니다. 옆 사람과 인사합니다. 우리는 가족입니다. 우리 교회를 방문하시는 많은 손님들이 ‘참 가족같은 분위기의 교회네요’라는 말씀을 해주십니다. 물론 그 말의 뜻을 잘 헤아리기에 감사하다고 인사드립니다만, 우리 교회는 가족 같은 공동체가 아니라 가족 그 자체 입니다. 초대교회의 이상적인 공동체는 결코 혈육으로 맺어진 가족은 아니었지만, 그 보다 더 진한 예수그리스도의 보혈로 하나되고 형제자매된 가족이었던 것입니다. 오늘은 5월 31일 가정의 달의 마지막 날을 보내면서, 초대교회의 가족의 생활상을 살펴보고 우리가 살아야 하는 공동체 삶의 모습에 대하여 생각해 보는 기회를 가지도록 하겠습니다.
1. 가족은 하나입니다(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가족은 마음과 뜻이 하나되어야 합니다. 즉, 함께 아파하고 함께 슬퍼하며 함께 기쁘고 행복해야 합니다. 지난 23일에 있었던 노무현 전대통령의 서거로 인하여 온 국민이 슬퍼하고 이를 추모하였습니다. 한 사람의 죽음을 맞이하여 많은 사람이 함께 아파하고 슬픔을 감추지 못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는 한 나라의 국민이라는 공동체 일원으로서 한 때 나라의 통치자였던 지도자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두 아들 녀석을 잃어버릴 뻔 한 적이 있습니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아무리 찾아도 눈에 띄지 않았을 때에는 행여라도 자식이 죽은 것은 아닐까 걱정하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왜 그렇게 아프고 마음 저렸던 것입니까. 이는 가족이기 때문입니다. 가족은 하나이기 때문에 한 사람의 아픔은 모든 가족이 아플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손가락 하나가 아파도 온 몸이 아픈 것과 같습니다. 만약 하나가 아닌 별개의 개체라면 함께 아플 이유도 없습니다. 슬픔도 기쁨도 아픔도 함께 느끼고 공유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가족 공동체는 완벽하게 하나가 되어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있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가족으로서 같은마음을 가지고 같은 말을 하며 같은 열매를 꿈꾸어야 합니다. 우리는 너와 내가 아니고 가족으로 모인 하나입니다.
2. 같이 누리는 것입니다(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가족은 모든 소유물을 공유합니다. 가족은 서로 공유해야 하는 물건을 개인이 소유하려고 하는 때 가족이 파괴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탕자의 비유에서 이러한 현상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작은 아들이 아버지의 재산 중에서 자신의 분깃을 주장하고 나누어 줄 것을 요구하는 때부터 탕자의 불행이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공산주의의 이론은 지구상 가장 완벽한 것입니다. 공산주의자가 주장하는 대로 함께 일하고 함께 나누며 부한 자도 가난한 자도 없는 공평한 생활은 말 그대로 낙원과 다를바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공산주의는 한 세기를 버티지 못하고 붕괴하고 말았습니다. 현대 사회에서는 자본주의를 도입하지 않는 한 반복되는 빈곤을 면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한국의 일부 기독교 교회에서도 공동체의 삶을 시도하였지만 제대로 운영되지 못하는 모습을 봅니다. 이들 공동체의 모델이 된 것은 성경에서 나오는 초대교회의 가족 공동체입니다. 그러나 초대교회의 가족이 아름답게 그 체제를 유지한 것에 반하여 현대 사회에서의 공동체 시도는 좀처럼 성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초대 교회의 공동체 성공 비결이 함께 누리는 것이라는 점에서 착오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초대 교회의 가족은 공동의 생산이 없었지만 그 중 핍절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생산이 없음에도 그 많은 공동체 일원들을 굶주리게 하지 않을 수 있었던 책임자원은 밭과 집 있는 자들이 이를 처분한 재산이었으며 사도는 이 처분 재산을 모두 관리하며 필요에 따라 공동체원에게 배분하였던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들이 서로 동의하였으며 자신의 소유를 주장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공산주의가 왜 붕괴할 수 밖에 없습니까? 측량기술의 발달로 인하여 정밀하고 균등하게 분배를 하는 것은 더이상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문제는 분배에 있는 것이 아니라 투자 즉 자본의 제공에 있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일하는 능률과 생산량이 같을 수 없기 때문에 생산이 결부되는 한 분배에는 분쟁과 이견이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초대교회에서 공동체 유지가 가능했던 것은 생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단지 소유재산을 팔아 얻은 모든 소득을 사도에게 내어놓고 이를 단순히 분배 즉 소비하기만 했기 때문에 생산의 질과 양에 대한 어떠한 다툼도 없었던 것입니다. 한편 우리 교회의 바자회는 어땠습니까? 얼마 전에 있었던 바자회가 성공적이었던 이유는 분배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모두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여 수고하였지만 이윤을 분배하지 않았고 그 누구도 수고의 대가를 받지 못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공동체 삶의 비결은 투자 혹은 배분이 없어야 합니다. 이 조건을 결여한 채 공동체의 삶을 추구한다면 넘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초대교회의 구성원은 자신의 소유를 주장하지 않았고 어느 것 하나 제 것이라고 여기지 않고 진정한 가족으로서 하나될 수 있었습니다. 내 것을 인정 받고 싶어한 순간 더이상 그 가족의 공동체는 유지될 수 없습니다. 초대교회의 가족들이 다 행복할 수 있었던 것은 재물을 자신의 것으로 여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2.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무리가 큰 은혜를 얻어)
가족이 재물을 함께 누리면서 물질을 공유한다고 한다면, 은혜는 영적인 공유입니다. 가족의 만족은 물질만으로 온전하게 채워질 수 없으며 반드시 영적인 만족이 수반되어야 진정한 행복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믿음의 가정이며 가족입니다. 이 은혜의 주제가 되어야 하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사건입니다. 예수 부활의 사건을 증거하고 다시 사신 예수를 화제 삼으면서 초대교회의 가족 공동체가 유지되었습니다. 우리가 화제로 삼아야 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주제와 우리의 화제도 오직 예수가 되어야 하는데 특히 다시 오실 예수를 증거함으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 은혜가 넘치는 것입니다. 재림하실 예수를 소망하고 이를 나아가 증거하는 것이 우리 가족 공동체의 화제가 되고 우리 삶의 충만한 은혜가 될 것입니다.
바라기는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으로 은혜가 넘치는 교회와 가정, 주님이 묶어 주신 하나의 공동체 안에서 무엇을 공유하고 화제 삼으며 어떻게 하나되어야 할지를 생각하며 주님 오실 그 날까지 더 행복한 삶이 저와 여러분 가운데 있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인생의 삶에서 어려움이 없다면 인생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우리의 삶에서 어려움은 떼어 놓을래야 떼어 놓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러한 어려움을 이겨내기에 큰 힘이 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자신에게 닥치는 갖가지 시련을 이겨낼 수 있게 해주는 원동력으로는 무엇보다도 가족의 존재를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저도 힘겨운 사춘기를 보내야만 했었는데 그나마 그 시기를 무사히 넘길 수 있게 한 것은 저의 가족이었습니다. 제가 잘못된 길로 갔을 경우에 가족이 겪어야 만 할 괴로움과 슬픔을 생각하면 감히 탈선의 길로 들어설 수 없었던 것입니다. 몇 년 전 일본을 감동시켰던 유명한 실화가 하나 있습니다. 오래된 집의 해체를 위해서 벽을 뜯어내는 공사를 하던 중 벽 속에서 못에 박힌 도마뱀 한 마리가 발견된 사건입니다. 이 도마뱀은 무려 1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그 벽 안에서 움직이지도 못한 채 살아왔다고 밝혀졌습니다. 그렇다면 이 움직일 수 없는 도마뱀은 과연 무엇을 먹으면서 생명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요? 이 수컷 도마뱀을 먹여 살린 것은 다름아닌 암컷 도마뱀이었습니다. 이 두마리의 도마뱀이 결코 짧은 시간이라 할 수 없는 10년의 세월을 견뎌내며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가족의 존재에 대한 의지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본문에서 나오는 초대교회의 모습은 가장 이상적인 공동체로 설명됩니다. 이는 단순한 공동체이기 전에 믿음으로 하나되는 가족이었습니다. 가족으로서 서로 책임지고 보호하는 가족의 기능을 십분 활용했습니다. 그래서 핍박의 시기에서도 하나님의 교회는 아름다운 한 가족으로 보다 성장하면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어려운 환경에서도 하나님의 교회가 더 크게 부흥할 수 있었던 이유는 철저하게 가족되었던 틀이 무너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가장인 아버지가 열심히 일 한 댓가로 월급을 가족의 생활비로 내어놓으면서 댓가를 요구하는 경우를 보셨습니까? 이러한 아버지가 있다면 이 공동체는 더이상 가족이 아닐 것입니다. 옆 사람과 인사합니다. 우리는 가족입니다. 우리 교회를 방문하시는 많은 손님들이 ‘참 가족같은 분위기의 교회네요’라는 말씀을 해주십니다. 물론 그 말의 뜻을 잘 헤아리기에 감사하다고 인사드립니다만, 우리 교회는 가족 같은 공동체가 아니라 가족 그 자체 입니다. 초대교회의 이상적인 공동체는 결코 혈육으로 맺어진 가족은 아니었지만, 그 보다 더 진한 예수그리스도의 보혈로 하나되고 형제자매된 가족이었던 것입니다. 오늘은 5월 31일 가정의 달의 마지막 날을 보내면서, 초대교회의 가족의 생활상을 살펴보고 우리가 살아야 하는 공동체 삶의 모습에 대하여 생각해 보는 기회를 가지도록 하겠습니다.
1. 가족은 하나입니다(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가족은 마음과 뜻이 하나되어야 합니다. 즉, 함께 아파하고 함께 슬퍼하며 함께 기쁘고 행복해야 합니다. 지난 23일에 있었던 노무현 전대통령의 서거로 인하여 온 국민이 슬퍼하고 이를 추모하였습니다. 한 사람의 죽음을 맞이하여 많은 사람이 함께 아파하고 슬픔을 감추지 못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는 한 나라의 국민이라는 공동체 일원으로서 한 때 나라의 통치자였던 지도자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두 아들 녀석을 잃어버릴 뻔 한 적이 있습니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아무리 찾아도 눈에 띄지 않았을 때에는 행여라도 자식이 죽은 것은 아닐까 걱정하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왜 그렇게 아프고 마음 저렸던 것입니까. 이는 가족이기 때문입니다. 가족은 하나이기 때문에 한 사람의 아픔은 모든 가족이 아플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손가락 하나가 아파도 온 몸이 아픈 것과 같습니다. 만약 하나가 아닌 별개의 개체라면 함께 아플 이유도 없습니다. 슬픔도 기쁨도 아픔도 함께 느끼고 공유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가족 공동체는 완벽하게 하나가 되어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있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가족으로서 같은마음을 가지고 같은 말을 하며 같은 열매를 꿈꾸어야 합니다. 우리는 너와 내가 아니고 가족으로 모인 하나입니다.
2. 같이 누리는 것입니다(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가족은 모든 소유물을 공유합니다. 가족은 서로 공유해야 하는 물건을 개인이 소유하려고 하는 때 가족이 파괴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탕자의 비유에서 이러한 현상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작은 아들이 아버지의 재산 중에서 자신의 분깃을 주장하고 나누어 줄 것을 요구하는 때부터 탕자의 불행이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공산주의의 이론은 지구상 가장 완벽한 것입니다. 공산주의자가 주장하는 대로 함께 일하고 함께 나누며 부한 자도 가난한 자도 없는 공평한 생활은 말 그대로 낙원과 다를바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공산주의는 한 세기를 버티지 못하고 붕괴하고 말았습니다. 현대 사회에서는 자본주의를 도입하지 않는 한 반복되는 빈곤을 면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한국의 일부 기독교 교회에서도 공동체의 삶을 시도하였지만 제대로 운영되지 못하는 모습을 봅니다. 이들 공동체의 모델이 된 것은 성경에서 나오는 초대교회의 가족 공동체입니다. 그러나 초대교회의 가족이 아름답게 그 체제를 유지한 것에 반하여 현대 사회에서의 공동체 시도는 좀처럼 성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초대 교회의 공동체 성공 비결이 함께 누리는 것이라는 점에서 착오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초대 교회의 가족은 공동의 생산이 없었지만 그 중 핍절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생산이 없음에도 그 많은 공동체 일원들을 굶주리게 하지 않을 수 있었던 책임자원은 밭과 집 있는 자들이 이를 처분한 재산이었으며 사도는 이 처분 재산을 모두 관리하며 필요에 따라 공동체원에게 배분하였던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들이 서로 동의하였으며 자신의 소유를 주장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공산주의가 왜 붕괴할 수 밖에 없습니까? 측량기술의 발달로 인하여 정밀하고 균등하게 분배를 하는 것은 더이상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문제는 분배에 있는 것이 아니라 투자 즉 자본의 제공에 있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일하는 능률과 생산량이 같을 수 없기 때문에 생산이 결부되는 한 분배에는 분쟁과 이견이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초대교회에서 공동체 유지가 가능했던 것은 생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단지 소유재산을 팔아 얻은 모든 소득을 사도에게 내어놓고 이를 단순히 분배 즉 소비하기만 했기 때문에 생산의 질과 양에 대한 어떠한 다툼도 없었던 것입니다. 한편 우리 교회의 바자회는 어땠습니까? 얼마 전에 있었던 바자회가 성공적이었던 이유는 분배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모두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여 수고하였지만 이윤을 분배하지 않았고 그 누구도 수고의 대가를 받지 못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공동체 삶의 비결은 투자 혹은 배분이 없어야 합니다. 이 조건을 결여한 채 공동체의 삶을 추구한다면 넘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초대교회의 구성원은 자신의 소유를 주장하지 않았고 어느 것 하나 제 것이라고 여기지 않고 진정한 가족으로서 하나될 수 있었습니다. 내 것을 인정 받고 싶어한 순간 더이상 그 가족의 공동체는 유지될 수 없습니다. 초대교회의 가족들이 다 행복할 수 있었던 것은 재물을 자신의 것으로 여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2.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무리가 큰 은혜를 얻어)
가족이 재물을 함께 누리면서 물질을 공유한다고 한다면, 은혜는 영적인 공유입니다. 가족의 만족은 물질만으로 온전하게 채워질 수 없으며 반드시 영적인 만족이 수반되어야 진정한 행복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믿음의 가정이며 가족입니다. 이 은혜의 주제가 되어야 하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사건입니다. 예수 부활의 사건을 증거하고 다시 사신 예수를 화제 삼으면서 초대교회의 가족 공동체가 유지되었습니다. 우리가 화제로 삼아야 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주제와 우리의 화제도 오직 예수가 되어야 하는데 특히 다시 오실 예수를 증거함으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 은혜가 넘치는 것입니다. 재림하실 예수를 소망하고 이를 나아가 증거하는 것이 우리 가족 공동체의 화제가 되고 우리 삶의 충만한 은혜가 될 것입니다.
바라기는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으로 은혜가 넘치는 교회와 가정, 주님이 묶어 주신 하나의 공동체 안에서 무엇을 공유하고 화제 삼으며 어떻게 하나되어야 할지를 생각하며 주님 오실 그 날까지 더 행복한 삶이 저와 여러분 가운데 있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