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유행했던 우스갯소리 중에 나폴레옹을 소재로 한 시리즈 개그가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이 적군을 공격하기 위하여 힘겹게 부대를 이끌고 한 산에 올라가더니 기껏 한다는 소리가 “이 산이 아닌가봐” 라고 했다는 겁니다. 그리고 다시 방향을 바꾸어 옆에 있는 다른 산을 힘겹게 등반하였습니다. 정상에 오르더니 나폴레옹이 하는 소리가 “아까 그 산이 맞는가봐” 였다는 허무 개그의 하나입니다
우리 삶을 바라보면 참 많은 난관과 역경이, 바로 우리의 오해를 통하여 초래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똑바로 바라보고 제대로 이해하면 그렇지 않을 것 우리의 오해 때문에 피명적인 고통을 겪게 되고 우리의 삶이 파괴되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 삶 속의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는 수많은 일들을 우리가 제어할 수 있다면 우리는 지금의 삶보다 한층 귀한 삶을 영위하는 것이 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삶이란, 살다보면 원하던 원치 않던을 불문하고 오해가 불거지는 것이 많습니다 오해는 그릇되게 해석하거나 잘못 아는 것, 그런 것이 우리의 오해입니다. 그런데 긴 역사를 통틀어 인류가 범했던 가장 큰 오해는 무엇이며, 가장 크게 오해한 사람을 꼽으라면 누구일까요? 저에게 한 사람을 지목하라고 한다면 저는 오늘 본문에 나오는 빌라도라고 대답하겠습니다.
본디오 빌리도는 현재에 이르기까지 약 2000년에 걸쳐 자신의 오해를 통하여 많은 이의 입술에 얹혀 예수 그리스도를 죽인 자로 불리어 지면서 끊임없이 저주되고 있습니다. 이는 본디오 빌라도의 오해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자신의 오해로 말미암아 지금까지도 예수를 죽인 자로 일컬어 지며 자신의 이름으로 오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있는 암울한 상황에 있는 것입니다. 조금 전에 모두가 고백한 사도신경에도 분명히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당하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사도신경의 이 부분에 대하여는 이를 인정할 수 없다는 일부 비판론도 존재합니다. 즉 부정론에 의하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을 당한 것은 본디오 빌라도의 고유의 책임이라기 보다는 나의 죄와 허물을 대신하여 죽으신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신경과 같이 일방적인 본디오의 책임으로 전가하는 것은 정당한 태도가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신경은 영적인 고백이라고 보다 역사적인 사실의 기록을 고백하는 전개구조를 취하고 있습니다. 즉 사도신경에 나열된 사건들을 정리해 보면, 하나님의 천자창조, 독생자 예수그리스도의 탄생, 십자가에서의 죽음과 사흘만의 부활, 하늘로의 승천과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심, 그리고 마지막으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심. 이와 같이 사도신경에서 고백되는 일련의 사건들은 역사의 사건을 재연하는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의 순간에 빌라도가 그 곳에 자리하였고, 십자가의 형을 집행하였음은 사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따라서 사도신경의 옳고 그름의 판단보다 어떠한 시점을 가지고 바라보느냐의 문제일 것이며, 또한 사도신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어 죽인 자로 본디오 빌라도의 이름을 거론하고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이와 같이 역사상 가장 큰 오해를 원인으로 가장 불행한 인생을 살았던 인물은 본디오 빌라도입니다. 그는 자신을 구원할 구세주를 눈앞에 두고도 자신의 죄를 사함 받기는커녕, 그를 십자가의 형으로 넘겨주어 죽음으로 몰아넣은 자리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끔찍한 불행의 시작은 자신의 오해였습니다. 오늘은 본디오 빌라도의 오해를 조명함에 의하여 우리 역시 신앙의 삶 속에서 나의 오해를 통하여 주님 앞에 아름답게 살지 못하는 점이 있는지를 같이 살펴보기 원합니다.
본문에서 본디오 빌라도는,
1. 유대인의 왕임을 오해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빌라도는 예수님에게 “네가 진정 유대인의 왕이냐”라고 물어봅니다. 예수님은 그에 대하여 “네 말이 옳도다”라고 대답합니다. 빌라도의 질문의 의도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임을 인정하고 있는 상태에서 확인차 물어본 것입니까 아니면 근본적인 의문을 가지고 물어본 것입니까? 후자입니다. 빌라도는 결코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임을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도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임을 확신하지 못하고 고백하지 못하는 분이 계시지는 않습니까?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입니다. 마태복음 2장 2절을 보면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러 온 동방박사 세 사람이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도다”라고 합니다. 예수님도 자신의 입술로 말씀 하신 바 있듯 예수님은 참된 유대인의 왕입니다. 그러나 총독 빌라도에게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이 아닌 단지 수많은 죄수 중의 한 사람에 불과하였습니다. 본문에서의 빌라도의 태도는 결코 유대인의 왕을 대하는 태도가 아니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눈은 보배로워야 합니다 우리의 눈은 보는 것에 의하여 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빌라도의 눈이 예수를 보면서 유대인의 왕이 아닌 죄수로 밖에 볼 수 없었음은, 그가 보배로움을 바라보는 눈을 가지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허름한 옷을 입은 볼품없는 청년, 그를 유대인의 왕으로 볼 수 없었음은 세상의 시각으로는 어쩌면 당연한지 모르겠습니다. 또한 당시의 정세는 유대와 사마리아 즉 지금의 팔레스타인 지역을 빌라도가 통치하고, 갈릴지 지역은 헤롯이 지배하는 상황이었으므로, 그러한 상황에서 총독인 빌라도 자신이 예수를 유대인의 왕으로 인정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는 빌라도의 질문에 예수님은 네 말이 옳다고 대답하였으나, 빌라도는 그 대답에 대하여 반응하지 않고 단지 이 군중들이 너에 관하여 많은 것을 말하는데 왜 그에 대하여 아무런 변명을 하지 않느냐라고 하면서 재판을 진행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에게 쏟아지는 각종 거짓 증언에 대하여는 침묵하면서 단지 빌라도의 질문에만 답하여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임을 긍정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빌라도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도 관심을 보이지도 않고 흘리고 말게 됩니다. 우리는 이러한 안타까운 모습을 보면서, 과연 빌라도만 예수님을 왕이 아닌 죄인으로 취급하고 있는 것인지, 우리는 진정 예수님을 나를 구원하여 이 땅에 오신 참된 유대인의 왕으로 대접하고 경배하고 있는 것인지, 혹시 나의 참된 주인이 아닌 단순한 삶의 조력자, 편리한 수종자로 보는 것은 아닌지, 나의 삶을 통하여 드러나는 것은 아닌지. 우리는 빌라도와 같은 오해를 해서는 안됩니다. 그 분은 진정한 왕이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독생자이며, 내 마음의 왕좌에 앉아야 할 오직 한 분인 구세주이기 때문에 그 분을 경배하고 그 분 앞에 무릎 꿇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내가 필요한 때만 그의 이름을 통하여서 내 목적을 이루려고 하는 것이 전부인 것은 아닌지 한번쯤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2. 예수를 죄인이라고 오해하고 있습니다.
15절에 명절을 당하면 총독이 무리의 소원대로 한 명의 죄수를 방면하는 관례가 나옵니다. 이러한 관례는 현대사회에도 특사라는 이름으로 행하여 지고 있습니다. 아직 선고된 형기를 채우지 못한 죄수를 특별한 시기를 기점으로 사면하여 주는 것입니다. 마침 유월절을 맞이하여 한 명의 죄수를 풀어줄 수 있는 관습을 이용하여, 빌라도는 내심 예수님을 놓아주려고 당대의 극악무도한 죄인 바나바와 예수 중 한 명을 선택할 것을 무리에게 요구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빌라도가 죄 없는 참된 주님을 단순한 죄인의 하나로 바라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이 땅의 오직 유일한 의인이며 죄 없이 정결한 분입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이 범한 모든 죄를 대속할 수 있는 유일한 분입니다. 빌라도는 그러한 참된 의인이며 결백한 예수님을 죄인이라는 전제 하에서 방면의 대상으로 보았습니다.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자신의 죄를 씻음 받아야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예수님을 죄인으로 보는 큰 죄를 범한 것입니다. 예수님과 같이 십자가에 매달린 강도들도 말합니다. 네가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면 하나님의 능력을 이용하여 여기서 내려가봐라. 네가 죽는 것이나 내가 죽는 것은 똑같이 자신의 죄로 인하여 죽는 그러한 모습이 아니냐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이러한 오해는 단지 그 당시에 국한된 것은 아닙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일컬어 자신의 죄 값에 의하여 죽은 2000년 전의 한 유대인 청년으로만 인식할 뿐,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시고 십자가에 매달리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죄인으로 오해하는 것은 비단 빌라도 뿐이 아닌 인류의 비극이며, 이러한 오해를 극복하여 예수님은 진정 우리를 구원한 구세주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3. 군중의 심중을 오해하고 있습니다.
18절 말씀에 ‘이는 저가 저들의 시기로 예수를 넘겨준 줄 알고 있다’는 구절이 나옵니다. 빌라도는 지금 당장의 군중의 흥분을 가라앉히면, 이러한 폭동 사태가 진정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군중들이 다시 잠잠해지면, 예수와 바나바 중 한명의 죄인을 방면함에 있어 극악무도한 죄인인 바나바를 선택할리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는 큰 오해였습니다. 군중이 단지 예수님을 죽이라고 요구한 것은 일시적인 군중심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성난 군중의 배후에는 그를 조종하는 세력인 종교지도자의 엄청난 압력, 모함이 있었습니다. 또한 그러한 종교 지도자의 배후에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려는 사단의 음모가 작용하고 있었습니다, 빌라도는 그러한 사실을 모르고 단지 눈 앞의 소동을 가라 앉히는데만 생각했습니다. 그는 자신과 군중심리를 이용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게 하려는 종교지도자의 속셈을 알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일은 지금에도 빈번히 일어나는 일입니다. 지금도 어디에나 늘 다수의 목소리로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는 집단적 이기주의 세력은 존재합니다. 그들은 무리 지어 큰 목소리를 내어 자신의 유익을 챙기려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본문에서 예수님은 군중의 거짓된 증언과 주장에 대하여는 귀를 기울이지 않고 침묵으로 일관하였습니다. 이에 반해 예수님의 평소의 삶은 어땠습니까? 연약하고, 부족하고, 가여운 단 한 사람의 신음소리에 몸을 구부려 귀를 기울이며 그들의 마음까지 위로하시는 주님이었습니다. 현대 사회의 문제가 무엇입니다. 아무리 부정하고 그릇된 생각이라도 많은 사람이 주장하고 외치면 정당한 것이 되며, 반면 아무리 옳고 바른 생각이라도 소수의 의견이라면 묻히고 소외당하는 것이 현대 민주주의의 문제점이며, 무서운 점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은 이 땅의 법도 준수해야 하지만 주님이 지키셨던 삶의 방식도 터득해야 합니다. 다수의 소리에 휩쓸려 옳고 그름을 분별치 못하고 살아갈 것인지, 아니면 우리 주님과 같이 다수의 소리에는 눈길을 돌리지 않고 지치고 불쌍한 자의 울음소리를 찾아 발길과 귀를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할지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빌라도는 세상의 힘의 원리에 제압되고 다수의 의견에 의하여 자신의 주관을 포기한 사람입니다. 세상 속에서의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예수님을 군중의 손에 내어준 그런 사람입니다. 그러나 기억해야 합니다. 진리는 다수가 아닌 소수에 있으며, 우리가 나아가야 하는 길은 넓은 길이 아닌 좁은 길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가는 길이 많은 사람이 회피하는 험난하고 거친 길이라도 그 길을 피하지 말고, 놓치지 말고 지켜가야 합니다. 설령 많은 무리가 우리를 위협하는 한이 있어도 우리는 그것을 이겨내고 주님이 걸으신 길을 함께 걸어야 합니다. 바로 빌라도는 다수의 논리에 빠져들어 가장 큰 오해와 영원히 지울 수 없는 큰 죄를 범하였고 결국 메시아를 죽게 만든 장본인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우리도 혹시 우리의 삶이 주님의 진리가 아닌 세상의 다수의 힘에 의하여 지배되고 있지는 않은지, 나의 삶의 지침이 되어야 하는 진리가 나의 삶 속에서 힘을 잃고 흔들리며 아버지의 말씀에 대체하여 세상의 논리와 이치가 나의 삶의 원리로 작용하는 것은 아닌가, 2000년 전의 빌라도와 같은 모습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봐야 할 것입니다.
4. 죄사함의 원리를 오해하고 있습니다.
24절을 보면,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가로되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이 사람의 피 값을 너희가 당하라’라고 말하는 빌라도가 나옵니다. 무죄함은 모든 죄인이 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죄사함이라 하는 것은 물로 손을 씻는 의식과 같이 사람이 정한 관례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빌라도는 관습을 통하여 자신의 무죄함을 증명하고 인정받기를 원했습니다. 큰 오해입니다. 이는 자신에게 위안이 되는 심리적인 위로가 될 지는 몰라도 정결하게 되는 죄사함의 결과로 이어질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아닌 다른 방법을 통하여 자신의 죄로부터 벗어나려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보혈을 제외하고는 어떠한 관례와 의식, 성대한 절차를 통하여서도 우리는 죄사함을 받지 못하며 그를 위하여 주님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입니다. 빌라도는 물에 손을 씻고 무죄함을 선포함으로써 죄에서 자유롭기를 희망하였으나 이것은 그의 오해에 불과하였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얼마나 자주 많이 예수님의 보혈을 희석시키고 있습니까? 예수님의 보혈이 우리의 신앙 속에 강 같이 넘쳐 흐르지 못하고 가뭄에 메말라 바닥을 드러낸 상태로 머물러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오직 예수님 앞에서 그분의 보혈을 간구함에 의하여만 죄 많은 나의 모든 허물을 정결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바랍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크고 작은 오해는 피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신앙에서의 결정적이고 근본적인 오해에 대하여는 경계를 늦추어서는 안됩니다. 빌라도가 간과했던 모든 부분에 있어 우리는 눈을 뜨고 있어야 합니다. 즉, 예수님은 진정한 왕이시며 그 분을 경배하고 그분을 온전한 주인으로 모셔야 합니다. 또한 예수님은 죄인이 아닌 유일한 의인으로 이 땅에 오셨음을 믿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 세상은 일견 다수의 힘에 의하여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승리하는 것은 다수의 억지가 아닌 진리이며, 죄사함은 주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에 의하여만 가능하므로 우리는 그 십자가 앞에 나아감으로써 정결케 될 수 있습니다. 이렇듯 여러분이 잘못된 오해에 신앙의 기반을 두지 않고 늘 깨어있어 근신함으로써, 2009년도 아름답게 승리하는 신앙의 삶을 가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 같이 인사하시겠습니다.
한 주 동안 평안하셨습니까?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예전에 유행했던 우스갯소리 중에 나폴레옹을 소재로 한 시리즈 개그가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이 적군을 공격하기 위하여 힘겹게 부대를 이끌고 한 산에 올라가더니 기껏 한다는 소리가 “이 산이 아닌가봐” 라고 했다는 겁니다. 그리고 다시 방향을 바꾸어 옆에 있는 다른 산을 힘겹게 등반하였습니다. 정상에 오르더니 나폴레옹이 하는 소리가 “아까 그 산이 맞는가봐” 였다는 허무 개그의 하나입니다
우리 삶을 바라보면 참 많은 난관과 역경이, 바로 우리의 오해를 통하여 초래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똑바로 바라보고 제대로 이해하면 그렇지 않을 것 우리의 오해 때문에 피명적인 고통을 겪게 되고 우리의 삶이 파괴되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 삶 속의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는 수많은 일들을 우리가 제어할 수 있다면 우리는 지금의 삶보다 한층 귀한 삶을 영위하는 것이 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삶이란, 살다보면 원하던 원치 않던을 불문하고 오해가 불거지는 것이 많습니다 오해는 그릇되게 해석하거나 잘못 아는 것, 그런 것이 우리의 오해입니다. 그런데 긴 역사를 통틀어 인류가 범했던 가장 큰 오해는 무엇이며, 가장 크게 오해한 사람을 꼽으라면 누구일까요? 저에게 한 사람을 지목하라고 한다면 저는 오늘 본문에 나오는 빌라도라고 대답하겠습니다.
본디오 빌리도는 현재에 이르기까지 약 2000년에 걸쳐 자신의 오해를 통하여 많은 이의 입술에 얹혀 예수 그리스도를 죽인 자로 불리어 지면서 끊임없이 저주되고 있습니다. 이는 본디오 빌라도의 오해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자신의 오해로 말미암아 지금까지도 예수를 죽인 자로 일컬어 지며 자신의 이름으로 오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있는 암울한 상황에 있는 것입니다. 조금 전에 모두가 고백한 사도신경에도 분명히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당하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사도신경의 이 부분에 대하여는 이를 인정할 수 없다는 일부 비판론도 존재합니다. 즉 부정론에 의하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을 당한 것은 본디오 빌라도의 고유의 책임이라기 보다는 나의 죄와 허물을 대신하여 죽으신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신경과 같이 일방적인 본디오의 책임으로 전가하는 것은 정당한 태도가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신경은 영적인 고백이라고 보다 역사적인 사실의 기록을 고백하는 전개구조를 취하고 있습니다. 즉 사도신경에 나열된 사건들을 정리해 보면, 하나님의 천자창조, 독생자 예수그리스도의 탄생, 십자가에서의 죽음과 사흘만의 부활, 하늘로의 승천과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심, 그리고 마지막으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심. 이와 같이 사도신경에서 고백되는 일련의 사건들은 역사의 사건을 재연하는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의 순간에 빌라도가 그 곳에 자리하였고, 십자가의 형을 집행하였음은 사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따라서 사도신경의 옳고 그름의 판단보다 어떠한 시점을 가지고 바라보느냐의 문제일 것이며, 또한 사도신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어 죽인 자로 본디오 빌라도의 이름을 거론하고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이와 같이 역사상 가장 큰 오해를 원인으로 가장 불행한 인생을 살았던 인물은 본디오 빌라도입니다. 그는 자신을 구원할 구세주를 눈앞에 두고도 자신의 죄를 사함 받기는커녕, 그를 십자가의 형으로 넘겨주어 죽음으로 몰아넣은 자리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끔찍한 불행의 시작은 자신의 오해였습니다. 오늘은 본디오 빌라도의 오해를 조명함에 의하여 우리 역시 신앙의 삶 속에서 나의 오해를 통하여 주님 앞에 아름답게 살지 못하는 점이 있는지를 같이 살펴보기 원합니다.
본문에서 본디오 빌라도는,
1. 유대인의 왕임을 오해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빌라도는 예수님에게 “네가 진정 유대인의 왕이냐”라고 물어봅니다. 예수님은 그에 대하여 “네 말이 옳도다”라고 대답합니다. 빌라도의 질문의 의도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임을 인정하고 있는 상태에서 확인차 물어본 것입니까 아니면 근본적인 의문을 가지고 물어본 것입니까? 후자입니다. 빌라도는 결코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임을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도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임을 확신하지 못하고 고백하지 못하는 분이 계시지는 않습니까?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입니다. 마태복음 2장 2절을 보면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러 온 동방박사 세 사람이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도다”라고 합니다. 예수님도 자신의 입술로 말씀 하신 바 있듯 예수님은 참된 유대인의 왕입니다. 그러나 총독 빌라도에게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이 아닌 단지 수많은 죄수 중의 한 사람에 불과하였습니다. 본문에서의 빌라도의 태도는 결코 유대인의 왕을 대하는 태도가 아니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눈은 보배로워야 합니다 우리의 눈은 보는 것에 의하여 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빌라도의 눈이 예수를 보면서 유대인의 왕이 아닌 죄수로 밖에 볼 수 없었음은, 그가 보배로움을 바라보는 눈을 가지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허름한 옷을 입은 볼품없는 청년, 그를 유대인의 왕으로 볼 수 없었음은 세상의 시각으로는 어쩌면 당연한지 모르겠습니다. 또한 당시의 정세는 유대와 사마리아 즉 지금의 팔레스타인 지역을 빌라도가 통치하고, 갈릴지 지역은 헤롯이 지배하는 상황이었으므로, 그러한 상황에서 총독인 빌라도 자신이 예수를 유대인의 왕으로 인정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는 빌라도의 질문에 예수님은 네 말이 옳다고 대답하였으나, 빌라도는 그 대답에 대하여 반응하지 않고 단지 이 군중들이 너에 관하여 많은 것을 말하는데 왜 그에 대하여 아무런 변명을 하지 않느냐라고 하면서 재판을 진행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에게 쏟아지는 각종 거짓 증언에 대하여는 침묵하면서 단지 빌라도의 질문에만 답하여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임을 긍정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빌라도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도 관심을 보이지도 않고 흘리고 말게 됩니다. 우리는 이러한 안타까운 모습을 보면서, 과연 빌라도만 예수님을 왕이 아닌 죄인으로 취급하고 있는 것인지, 우리는 진정 예수님을 나를 구원하여 이 땅에 오신 참된 유대인의 왕으로 대접하고 경배하고 있는 것인지, 혹시 나의 참된 주인이 아닌 단순한 삶의 조력자, 편리한 수종자로 보는 것은 아닌지, 나의 삶을 통하여 드러나는 것은 아닌지. 우리는 빌라도와 같은 오해를 해서는 안됩니다. 그 분은 진정한 왕이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독생자이며, 내 마음의 왕좌에 앉아야 할 오직 한 분인 구세주이기 때문에 그 분을 경배하고 그 분 앞에 무릎 꿇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내가 필요한 때만 그의 이름을 통하여서 내 목적을 이루려고 하는 것이 전부인 것은 아닌지 한번쯤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2. 예수를 죄인이라고 오해하고 있습니다.
15절에 명절을 당하면 총독이 무리의 소원대로 한 명의 죄수를 방면하는 관례가 나옵니다. 이러한 관례는 현대사회에도 특사라는 이름으로 행하여 지고 있습니다. 아직 선고된 형기를 채우지 못한 죄수를 특별한 시기를 기점으로 사면하여 주는 것입니다. 마침 유월절을 맞이하여 한 명의 죄수를 풀어줄 수 있는 관습을 이용하여, 빌라도는 내심 예수님을 놓아주려고 당대의 극악무도한 죄인 바나바와 예수 중 한 명을 선택할 것을 무리에게 요구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빌라도가 죄 없는 참된 주님을 단순한 죄인의 하나로 바라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이 땅의 오직 유일한 의인이며 죄 없이 정결한 분입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이 범한 모든 죄를 대속할 수 있는 유일한 분입니다. 빌라도는 그러한 참된 의인이며 결백한 예수님을 죄인이라는 전제 하에서 방면의 대상으로 보았습니다.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자신의 죄를 씻음 받아야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예수님을 죄인으로 보는 큰 죄를 범한 것입니다. 예수님과 같이 십자가에 매달린 강도들도 말합니다. 네가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면 하나님의 능력을 이용하여 여기서 내려가봐라. 네가 죽는 것이나 내가 죽는 것은 똑같이 자신의 죄로 인하여 죽는 그러한 모습이 아니냐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이러한 오해는 단지 그 당시에 국한된 것은 아닙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일컬어 자신의 죄 값에 의하여 죽은 2000년 전의 한 유대인 청년으로만 인식할 뿐,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시고 십자가에 매달리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죄인으로 오해하는 것은 비단 빌라도 뿐이 아닌 인류의 비극이며, 이러한 오해를 극복하여 예수님은 진정 우리를 구원한 구세주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3. 군중의 심중을 오해하고 있습니다.
18절 말씀에 ‘이는 저가 저들의 시기로 예수를 넘겨준 줄 알고 있다’는 구절이 나옵니다. 빌라도는 지금 당장의 군중의 흥분을 가라앉히면, 이러한 폭동 사태가 진정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군중들이 다시 잠잠해지면, 예수와 바나바 중 한명의 죄인을 방면함에 있어 극악무도한 죄인인 바나바를 선택할리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는 큰 오해였습니다. 군중이 단지 예수님을 죽이라고 요구한 것은 일시적인 군중심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성난 군중의 배후에는 그를 조종하는 세력인 종교지도자의 엄청난 압력, 모함이 있었습니다. 또한 그러한 종교 지도자의 배후에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려는 사단의 음모가 작용하고 있었습니다, 빌라도는 그러한 사실을 모르고 단지 눈 앞의 소동을 가라 앉히는데만 생각했습니다. 그는 자신과 군중심리를 이용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게 하려는 종교지도자의 속셈을 알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일은 지금에도 빈번히 일어나는 일입니다. 지금도 어디에나 늘 다수의 목소리로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는 집단적 이기주의 세력은 존재합니다. 그들은 무리 지어 큰 목소리를 내어 자신의 유익을 챙기려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본문에서 예수님은 군중의 거짓된 증언과 주장에 대하여는 귀를 기울이지 않고 침묵으로 일관하였습니다. 이에 반해 예수님의 평소의 삶은 어땠습니까? 연약하고, 부족하고, 가여운 단 한 사람의 신음소리에 몸을 구부려 귀를 기울이며 그들의 마음까지 위로하시는 주님이었습니다. 현대 사회의 문제가 무엇입니다. 아무리 부정하고 그릇된 생각이라도 많은 사람이 주장하고 외치면 정당한 것이 되며, 반면 아무리 옳고 바른 생각이라도 소수의 의견이라면 묻히고 소외당하는 것이 현대 민주주의의 문제점이며, 무서운 점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은 이 땅의 법도 준수해야 하지만 주님이 지키셨던 삶의 방식도 터득해야 합니다. 다수의 소리에 휩쓸려 옳고 그름을 분별치 못하고 살아갈 것인지, 아니면 우리 주님과 같이 다수의 소리에는 눈길을 돌리지 않고 지치고 불쌍한 자의 울음소리를 찾아 발길과 귀를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할지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빌라도는 세상의 힘의 원리에 제압되고 다수의 의견에 의하여 자신의 주관을 포기한 사람입니다. 세상 속에서의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예수님을 군중의 손에 내어준 그런 사람입니다. 그러나 기억해야 합니다. 진리는 다수가 아닌 소수에 있으며, 우리가 나아가야 하는 길은 넓은 길이 아닌 좁은 길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가는 길이 많은 사람이 회피하는 험난하고 거친 길이라도 그 길을 피하지 말고, 놓치지 말고 지켜가야 합니다. 설령 많은 무리가 우리를 위협하는 한이 있어도 우리는 그것을 이겨내고 주님이 걸으신 길을 함께 걸어야 합니다. 바로 빌라도는 다수의 논리에 빠져들어 가장 큰 오해와 영원히 지울 수 없는 큰 죄를 범하였고 결국 메시아를 죽게 만든 장본인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우리도 혹시 우리의 삶이 주님의 진리가 아닌 세상의 다수의 힘에 의하여 지배되고 있지는 않은지, 나의 삶의 지침이 되어야 하는 진리가 나의 삶 속에서 힘을 잃고 흔들리며 아버지의 말씀에 대체하여 세상의 논리와 이치가 나의 삶의 원리로 작용하는 것은 아닌가, 2000년 전의 빌라도와 같은 모습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봐야 할 것입니다.
4. 죄사함의 원리를 오해하고 있습니다.
24절을 보면,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가로되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이 사람의 피 값을 너희가 당하라’라고 말하는 빌라도가 나옵니다. 무죄함은 모든 죄인이 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죄사함이라 하는 것은 물로 손을 씻는 의식과 같이 사람이 정한 관례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빌라도는 관습을 통하여 자신의 무죄함을 증명하고 인정받기를 원했습니다. 큰 오해입니다. 이는 자신에게 위안이 되는 심리적인 위로가 될 지는 몰라도 정결하게 되는 죄사함의 결과로 이어질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아닌 다른 방법을 통하여 자신의 죄로부터 벗어나려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보혈을 제외하고는 어떠한 관례와 의식, 성대한 절차를 통하여서도 우리는 죄사함을 받지 못하며 그를 위하여 주님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입니다. 빌라도는 물에 손을 씻고 무죄함을 선포함으로써 죄에서 자유롭기를 희망하였으나 이것은 그의 오해에 불과하였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얼마나 자주 많이 예수님의 보혈을 희석시키고 있습니까? 예수님의 보혈이 우리의 신앙 속에 강 같이 넘쳐 흐르지 못하고 가뭄에 메말라 바닥을 드러낸 상태로 머물러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오직 예수님 앞에서 그분의 보혈을 간구함에 의하여만 죄 많은 나의 모든 허물을 정결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바랍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크고 작은 오해는 피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신앙에서의 결정적이고 근본적인 오해에 대하여는 경계를 늦추어서는 안됩니다. 빌라도가 간과했던 모든 부분에 있어 우리는 눈을 뜨고 있어야 합니다. 즉, 예수님은 진정한 왕이시며 그 분을 경배하고 그분을 온전한 주인으로 모셔야 합니다. 또한 예수님은 죄인이 아닌 유일한 의인으로 이 땅에 오셨음을 믿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 세상은 일견 다수의 힘에 의하여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승리하는 것은 다수의 억지가 아닌 진리이며, 죄사함은 주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에 의하여만 가능하므로 우리는 그 십자가 앞에 나아감으로써 정결케 될 수 있습니다. 이렇듯 여러분이 잘못된 오해에 신앙의 기반을 두지 않고 늘 깨어있어 근신함으로써, 2009년도 아름답게 승리하는 신앙의 삶을 가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