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0 |
2018. 11. 11 주일오후예배 (벧후3:11-13 베드로후서 강해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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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실이 |
2018-11-26 |
2373 |
399 |
2018. 04. 29 교회설립5주년감사 및 임직예배 (계2:8-11 죽도록 충성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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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실이 |
2018-05-22 |
2348 |
398 |
2019. 01. 20 주일오후예배 설교:이응주목사 (창12:1-4 아브라함의 순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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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실이 |
2019-07-31 |
2347 |
397 |
2019. 12. 22 주일오전예배 설교 (요5:24-29 아들을 믿는자에게 주시는 생명) 40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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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실이 |
2019-12-28 |
2335 |
396 |
2020. 01. 12 주일오전예배 설교 (요5:40-47 유대인이 예수를 믿지않는 이유) 43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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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실이 |
2020-01-20 |
2334 |
395 |
2023. 02. 19 주일오전예배 설교 (요21:23 넘어서야 할 유혹) 201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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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실이 |
2023-03-05 |
2329 |
394 |
2018. 10. 07 주일오후예배 (벧후3:6-7 베드로후서 강해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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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실이 |
2018-10-10 |
2324 |
393 |
2019. 11. 17 주일추수감사절예배 설교 (마4:35-38 추수할 때)35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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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실이 |
2019-12-10 |
2314 |
392 |
2021. 07. 25 주일오전예배 설교 (요13:12-20 구원은) 121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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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실이 |
2021-09-14 |
2314 |
391 |
2019. 11. 24 주일오전예배 설교 (요5:1-5 베데다스의 사람들) 36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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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실이 |
2019-12-10 |
2309 |
390 |
2018. 01. 21 주일오후예배 (행1:1~12 하나님의 타이밍에 하나님의 방법으로)김기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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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실이 |
2018-02-05 |
2297 |
389 |
2020. 05. 17 주일오후예배 설교 (히1111-12 히브리서 강해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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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실이 |
2020-05-25 |
2295 |
388 |
2023. 01. 01 주일오전예배 설교 (요21:01-06 그럼에도 주시는 축복) 194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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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실이 |
2023-02-05 |
2288 |
387 |
2019. 01. 13 주일오후예배 설교:김기도목사 (사사기3:11 취향이 독특하신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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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실이 |
2019-07-19 |
2287 |
386 |
2020. 02. 09 주일오후예배 설교:전용선선교사(고후5:6-10 소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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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실이 |
2020-02-24 |
2280 |
385 |
2017. 12. 25 성탄절예배 (마1:18-25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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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실이 |
2018-02-04 |
2270 |
384 |
2019. 11. 10 주일오전예배 설교:박갈렙 선교사 (마25:14-30 결산하시는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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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실이 |
2019-12-10 |
2264 |
383 |
2020. 02. 02 주일오후예배 설교:김시철목사 (시119:55-66 여호와는 나의 분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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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실이 |
2020-02-24 |
2260 |
382 |
2023. 02. 12 주일오전예배 설교 (요21:20-22 인간의 성향) 200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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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실이 |
2023-03-05 |
2249 |
381 |
2019. 01. 06주일오후예배 설교:김안신목사(겔3:17-21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파수꾼의 사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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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실이 |
2019-06-16 |
2233 |
옆 사람과 앞의 사람과 인사하시겠습니다. 한 주간 동안 평안하셨습니까?
평안한 모습으로 뵙게 된 것에 감사합니다. 왜냐하면 요즘은 시대가 악하고 잔인해졌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범죄의 형태가 주도면밀하고 경악스러운지 모를 정도로 이 시대는 악하게 흘러가고 있습니다. 옛날의 자연의 순리는 느껴지지 않고 숨막히고 강팍하고 살벌함이 넘치는 그러한 시대인 것 같습니다. 요즘 한국은 연일 밝혀지는 연속살인범의 끔찍한 사건진상에 의한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경악하고 슬퍼하고 유족의 오열은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삼가 위로의 말씀을 전합니다. 그러한 와중에서도 강호순의 팬카페가 만들어져 논란을 더하고, 다시 인권을 논하며 서로 옳다 그르다를 다투는 갑론을박도 시끄럽습니다. 한편, 마침 졸업시즌을 맞아 여러 가지 신기한 졸업식의 모습도 보이는데 한국의 졸업문화와 풍토가 언제부터 이렇게 변하였는지 이제는 바라보기에도 남사스러울 지경이 되어 더 이상 예전에 느꼈던 졸업식의 감사함과 엄숙함을 전혀 찾아 볼 수 없고 세속적인 풍토만 남아있습니다. 졸업생들은 온통 밀가루를 뒤집어쓰는 정도의 것은 오히려 아직 봐줄 만합니다. 옷을 죄다 갈기갈기 찢고 서로 엮은 알 수 없는 옷차림으로 거리를 활보하며 보는 이들이 눈을 뜨고 볼 수 없는 광경을 연출하고 있습니다. 참 답답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또한 지금도 여기저기서 벌어지는 농성들은 아직도 그치지 않고 자신의 생각과 뜻이 관철되지 않으면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는 시위 문화 속에서 애꿎은 피해자만 속출하고 있고, 장기간의 경기 침체로 인하여 실직률은 나날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최근 충격적인 한 사건이 일어났는데 실직한 40대 가장이 아들 2명과의 약속을 위하여 아들이 피씨방에서 컴퓨터를 절도하는 것을 망을 보아 준 사건입니다. 이와 같이 현시대는 너무나도 어지럽고 제정상이 아닙니다. 어제 청년회의 진희 자매에게 식사를 대접받았습니다. 지난 주 설교 시간에 아직 저에게 밥을 얻어먹지 못한 사람이 있으면 손을 들라는 저의 말에 진희 자매가 가장 먼저 손을 번쩍 들었는데, 밥 사줄테니 찾아 오라는 저의 말을 기억하고 얻어 먹기 전에 먼저 목사님을 대접하고 싶다면서 연락을 해 온 것입니다. 그래서 저희 내외가 진희 자매와 같이 식사를 하는데 그 때 음식점에서 흘러 나온 유행가가 바로 ‘미쳤어’라는 노래였습니다. 사랑을 주제로 하며 떠나간 사랑을 안타까워 하는 절절한 내용의 곡임에도 불구하고, 노래의 태반을 차지하는 가사말은 그저 ‘미쳤어’뿐입니다. 한국에서 요즘 최고의 히트곡으로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는 곡이었는데, 유행가만큼 시대상을 발 빠르게 반영하는 것이 없다는 점에서 볼 때 지금 한국 사회가 제정신이 아닌 것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제가 젊은 시절에도 사랑과 이별을 주제로 하는 내용의 대중가요를 즐겨 들었습니다만 가사의 분위기는 전혀 달랐습니다. 같은 내용을 다루면서도 표현이 달랐습니다. 시간을 더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 선조들의 사랑노래는 더욱더 잔잔하고 애절했습니다. 이렇듯 시대에 따라서 같은 현상을 표현하는 말이 달라지는 것은 어떠한 것을 의미할까요?
오늘 본문에 주님이 십자가를 지면서 고난과 고통을 겪으시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 전과 그 후의 말씀은 지난 2주의 설교를 통하여 말씀드렸고, 오늘 본문의 말씀은 그 중간의 사건으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시는 모습을 다루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구레네의 아들 시몬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가는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렇게 옛날에 일어났던 사건을 현재의 시점에서 바라보면 그에 대한 느낌과 해석이 달라집니다. 시몬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진 것은 지금과 같으면 결코 일어날 수 없었던 사건입니다. 지금 어느 누가 중죄를 지었다고 합시다. 사람을 몇 명이나 잔인하게 죽였다고 해서 예수님이 감당하신 십자가의 중형을 집행하는 것이 가능하겠습니까? 또 곁에 있다는 이유로 해서 대신 감당할 것을 요구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2000년 전의 시대에서는 이러한 일이 가능했습니다. 시몬이 졌던 십자가와 예수님이 지셨던 십자가, 그리고 나 자신이 져야만 하는 십자가의 성질과 내용이 2000년이라는 시간을 통하여 어떻게 변화되었는지를 같이 살펴보면서 은혜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1. 우연히 진 십자가와 필연의 십자가
시몬이 진 십자가는 우연히 진 십자가였습니다. 옆에 있다가 우연히 들게 된 십자가였습니다. 본인의 희망에 의하여 진 것이 아니고 단지 그 때 옆에 있는 건장한 청년이라는 것이 그에게 십자가를 들게 한 이유입니다. 구레네 지방은 북아프리카 애굽의 서쪽에 위치하며 여기는 유대인이 많이 살고 있던 땅이었습니다. 그 곳에서 이제 유월절 절기로 인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온 많은 사람 중의 한 명이 시몬입니다. 그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는 그 과정을 지켜보는 관중에 불과하였고 예수님이 어느 순간 쓰러져 더 이상 자신의 힘으로 걸을 수 없는 상황에 이르자 십자가형을 서두르기 위하여 로마 병사에 의하여 강제로 대신 들게 되었습니다. 즉 시몬에게 있어 예수님은 아무런 관계없는 가련한 사형수에 불과하였습니다. 이렇게 시몬이 진 십자가는 인과관계 없이 우발적 상황에 의한 우연의 십자가입니다. 그러나 2000년이 지난 지금 우리가 지고 가야 하는 십자가는 필연의 십자가입니다. 시몬의 십자가와 달리 우리의 십자가는 우연히 주어진 것이 아니며 내게 있어 결코 만나지 않으면 안되는 가장 중요한 필연의 십자가입니다. 내 인생을 통틀어 가장 큰 의미가 있는 십자가입니다. 2000년이 지난 지금 구레네의 사람 시몬이 진 십자가도 우리의 관점에서 본다면 그는 결코 우연의 십자가가 아닌 하나님의 사랑을 운명적으로, 이와 같이 십자가는 우리의 생명과 연관되는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현대인에게 있어 십자가는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까? 십자가를 내 죄를 사한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의 복음을 전달하는 도구가 아니라 단순히 장신구에 그치지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몸에 지니는 십자가 팬던트는 그의 신앙과 아무런 관계가 없고, 그저 몸을 장식하는 화려한 악세서리의 하나일 뿐입니다. 내 생명의 참된 속죄함을 의미해야하는 십자가가 나 자신의 아름다움을 돋보이게 하는 장신구로 전락한 것은 아닌지 염려스럽습니다. 십자가에는 죄사함이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이룩한 확실한 복음이 있어야 하며, 인생의 모든 문제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해결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2000년 전 구레네의 사람 시몬은 우연히 지게 된 십자가를 통하여 축복을 받는 행운의 주인공이 되었으나, 우리의 삶에서는 십자가는 행운에 그치는 것이 아닌 가장 확실한 축복의 수단이 되어야 하면 없어서는 안되는 필수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2. 억지로 진 십자가와 자발적으로 진 십자가
시몬은 타의에 의하여 억지로 십자가를 지었습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다보면 내 의지와 무관하게 어쩔 수 없이 하게 되는 일들을 겪곤 합니다. 그때의 지배적인 감상은 억울함입니다. 왜 내가 이러한 일을 당하여야 하는가 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내 인생을 되돌아 판단할 때 그 사건이 내 인생에서 매우 중요한 전환점이 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됩니다. 그 당시에는 정말 끔찍하고 싫었던 그러한 사건이 내 인생을 놀랍게 변화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대부분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는 사건이 그렇습니다. 소경이나 문둥병자, 귀머거리, 병들거나 죽은 자 등 너무나도 고통 받고 괴로워하는 자들이 예수님을 만나 새로운 삶을 찾고 변화되는 모습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므로 여러분, 그 당시 억울했던 그 사건이 지금 내게 있어 감사한 일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있는 어떠한 사건에 대하여 함부로 속단하고 낙심할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2000년 전 시몬이 억지로 십자가를 진 사건이 그에게 어떠한 축복의 결과를 가져왔는지를 보면 더욱 명확합니다. 마가복음 15장 21절은 같은 사건을 보다 자세히 기술하고 있습니다. 마침 시몬에 대한 소개가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비인 구레네의 사람 시몬이’라는 문구로 되어있습니다. ‘그가 시골로 와서 지나가는데 저희가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 ’라고 정황도 더욱 자세히 서술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16장 13절에서 바울은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의 어머니를 문안하라’라고 말하며 ‘그 어머니는 내 어머니니라’라고 말합니다. 이는 바울이 자신의 어머니와 마찬가지라고 고백할 만큼 시몬의 부인이 그 아들들과 함께 초대교회에서 유력한 인물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억지로 진 십자가임에도 불구하고 그 가족과 후손을 초대교회의 영향력 있는 인물로 만들 만큼의 대단한 결과를 초래한 십자가의 힘. 그러나 지금 우리가 지는 십자가는 자원의 십자가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억지로 지는 것이 아니라 나의 구원을 이룬 십자가를 자원하여 자진하여 지는 사명의 십자가인 것입니다. 21세기의 우리가 지는 십자가는 주님을 향한 아름다운 사랑의 고백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도 누가복음14장 27절에서 ‘누구든지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쫒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모두 자신만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쫒고 있는 것입니다. 억지로 지는 십자가에도 주님의 엄청난 축복이 머물렀거늘 우리가 자원하여 지는 주님에 대한 사랑의 고백으로서 지는 십자가가 우리의 인생과 영원한 삶에 있어 어느 정도로 놀라운 축복으로 머물 것인지는 가히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날 것입니다. 우리는 구레네의 사람 시몬과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도 십자가를 져야 했고 우리 역시 십자가를 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다만 그 모양이 다를 뿐입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지는 모습이 진정 주님에 대한 사랑의 고백으로서 자발적이고 기쁨에 충만한 모습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