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 |
2008.11.09.주일오전예배(겟세마네 기도를 기억하는가?#3 마(マタイ福音書)26:36-46)
1
|
김현우집사 |
2008-11-09 |
9588 |
239 |
2009.7.5 주일 찬양예배 설교말씀 (잠언箴言 24:1~2솔로몬의 잠언)
|
정장수 |
2009-07-05 |
9589 |
238 |
2009.5.24 주일 설교말씀 (전(コへレトの言葉)11:9-10/청년의 날)
2
|
정장수 |
2009-05-24 |
9593 |
237 |
2009.6.10 수요예배 설교말씀 (ヨハネによる福音書 9:35-41/요한복음강해)
|
정장수 |
2009-06-11 |
9593 |
236 |
2013. 2. 10 오후예배 설교:김용수목사
1
|
안재석전도사 |
2013-02-13 |
9604 |
235 |
2009.6.21주일 설교말씀 (행(使徒言行錄)14:8-18/루스드라에서의 교훈)
|
정장수 |
2009-06-22 |
9616 |
234 |
2009.12.20 주일 설교(행使徒言行錄17:1-9 세상을 향한 복음의 진보2)
|
정장수 |
2009-12-22 |
9616 |
233 |
신년부흥성회 2013.1.4~6 강사:임진형목사(둘쨋날)
|
안재석전도사 |
2013-01-20 |
9616 |
232 |
2009.6.28주일 설교말씀 (행(使徒言行錄)14:8-18/루스드라에서의 교훈2)
|
정장수 |
2009-06-28 |
9620 |
|
2009.1.18 주일 설교말씀 (마(マタイ福音書)27:27-31/예수님이 받은 멸시와 천대)
1
|
김현우집사 |
2009-01-18 |
9629 |
230 |
2009.11.15 주일 설교 (행使徒言行錄16:23-26 하늘의 가치가 이 땅에서는)
|
정장수 |
2009-11-15 |
9638 |
229 |
2010.11.28. 주일 설교 말씀
|
김현우집사 |
2010-11-28 |
9638 |
228 |
2013. 2. 17 주일오전예배 김용수목사 설교
|
안재석전도사 |
2013-02-20 |
9641 |
227 |
2009.8.19 수요예배 설교 (요한복음강해)
|
정장수 |
2009-08-26 |
9646 |
226 |
2012년7월15일 주일오후찬양예배 설교말씀 (잠언29:26/솔로몬의 잠언)
|
윤상숙 |
2012-07-15 |
9646 |
225 |
2009.7.15 수요예배 설교말씀 (ヨハネによる福音書 10:16-18/요한복음강해)
|
정장수 |
2009-07-16 |
9652 |
224 |
2009.10.21 수요예배 설교 (요한복음강해)
|
정장수 |
2009-10-22 |
9652 |
223 |
2009.12.30 수요예배 설교 (요한복음강해)
|
정장수 |
2010-01-16 |
9655 |
222 |
2010.2.14 주일 찬양예배 설교말씀 (솔로몬의 잠언)
|
정장수 |
2010-04-10 |
9660 |
221 |
2009.7.5주일 설교말씀 (행(使徒言行錄)14:8-18/루스드라에서의 교훈3)
|
정장수 |
2009-07-05 |
9661 |
다 함께 인사하시겠습니다. 한 주간 동안 평안하셨습니까?
또 한 가지 인사를 덧붙입니다, 감기 조심하십시오. 저도 완전히 회복되지는 않았지만 스쳐지나가는 감기에 걸렸었습니다. 감기에 한번 걸리면 한 달을 족히 앓아 누워야 하는 체질이기 때문에 무척 걱정했었으나 다행히 목으로 시작한 감기는 금방 낫고 있어 주님께 감사 드립니다. 일본은 한국보다 안 춥다고 방심 마시고 든든히 잘 입고 다니시기 바랍니다.
저는 오래간만에 영화를 한 편 보았습니다. ‘내 생애 최고의 경기’라는 영화입니다. 보신 분도 계시겠지만 이 영화는 20세기 초에 세계적인 골프스타로서 영국을 빛냈던 해리 버튼과 함께 US오픈 제18회 대회에 출전하였던 프란시스 위멧이라는 무명선수와 그의 캐디였던 에디 라우워리라는 10살 어린이를 다룬 이야기입니다. 아마추어 선수인 프란시스 위멧과 그의 캐디였던 10살짜리 소년 에디 라우워리가 당대 최고의 골프 스타를 상대로 하여 플레이오프까지 올라가서 승리를 거머쥔 것은 전무후무한 놀라운 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 US오픈은 108회에 걸쳐 개최되어 오면서 수많은 진기록을 남겼으나 이 기록은 지금까지도 갱신되지 않은 것으로 이 기록이 영화의 소재로서 사용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영화의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주인공들이 겪은 엄청난 무시와 천대, 그리고 보이지 않는 멸시가 오늘 말씀과 연관이 있기 때문입니다. 당시의 골프경기는 신사와 귀족의 경기의 상징이었기 때문에 유명 골프스타였던 해리 버튼은 물론 아마추어 선수인 프란시스 위멧은 가난한 서민 출신이라는 이유로 끊임없이 시련을 견디고 이겨내야 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핍박의 이유는 신분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만왕의 왕 되신 당신께서 친히 인간의 왕이라는 신분으로 이 땅에서 심한 멸시와 천대를 받는 모습이 나오지만 예수님은 우리에게도 우리의 크리스천이라는 신분 때문에 우리가 받게 될 멸시와 천대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고난과 멸시를 당하기 전에 이미 “너희도 내 이름으로 인하여 너희에게 돌아갈 그러한 일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5장 11절에서는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 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고, 또 마태복음 10장 18절에서는 “또 너희가 나를 인하여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리니 이는 저희와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하셨습니다. 나아가 마가는 우리가 어떤 멸시와 천대를 받는지에 대하여 보다 더 구체적으로 기술하였습니다. 즉, 마가복음 13장 9절은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사람들이 너희를 공회에 넘겨주겠고 너희를 회당에서 매질하겠으며 나를 인하여 너희가 관장들과 임금들 앞에 서리니 이는 저희에게 증거되려 함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믿음의 사람이라는 우리의 신분에 의하여 핍박과 멸시와 천대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크리스천이란 무엇보다도 영광스럽고 존귀한 신분이지만, 더 이상 한국에서는 크리스천을 영광스럽게 보지 않습니다. 기독교를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은 기독교를 ‘개독교’라고 부르며 비판과 증오의 대상으로 바라보고 주님의 영광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지금 6개월에 거쳐 마지막 때에 되어질 일에 대하여 강론하고 있는데, 이제 도래하는 시대에는 예수님이 핍박을 겪으심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역시 예수님의 제자라는 신분에 의하여 겪게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주님의 이름으로 인하여 세상의 멸시와 천대의 대상이 되는 것은 영광이고 복입니다. 세상의 끝날에 하나님 앞에 섰을 때 그 이상으로 내가 영광의 분깃을 받는 방법은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점검하고 싶은 것은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주님과 같은 자리에 서서 핍박을 받는, 더 할 나위 없이 영광스러운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의 우리의 삶이 오히려 주님을 핍박하는 로마의 군사와 같은 자리에 서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주님과 같이 가장 낮은 자의 신분으로 주님과 같은 자리에서 핍박을 받아야 마땅할 것인데 오히려 주님을 조롱하고 핍박하는 로마 병사의 위치에 있는 것은 아닌지에 대하여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같이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주님이 받은 멸시와 천대는 어떠한 것이었습니까?
1. 옷 벗김을 당하였습니다.
28절의 상반절에서는 예수님의 옷이 벗겨졌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바꾸어 말하면 수치심의 옷이 입혀졌다는 것입니다. 벌거벗음의 수치, 패배의 수치, 그리고 죄의 수치를 입은 것입니다. 옷의 기능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몸을 따뜻하게 하는 보온의 기능, 보다 아름답게 보이게 하는 미의 기능과 함께 또 하나 옷이 가지는 기능으로 신분 상징의 기능을 들 수 있습니다. 이 자리에서도 보시면 성가대원이 입고 있는 옷이 다른 성도들의 것과 좀 다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사람에게 질문하지 않아도 그의 옷만 보고 찬양을 하는 성가대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적인 접근으로는 최초의 옷의 기능은 부끄러움을 감추어 주는 기능이었습니다. 아담과 이브는 원죄를 범한 후 스스로 옷을 만들어 자신의 치부를 가렸고, 하나님께서 그런 두 사람에게 짐승을 잡아 가죽옷을 해주셨습니다. 이는 보온이나 미를 추구한 것이 아니고 옷을 입음으로써 수치스러움을 감춘 것입니다. 그러나 현대에서는 옷의 이러한 기능은 다소 변질되어 있습니다. 오늘날은 많이 벗고 드러내는 것에 대하여 부끄러움을 느끼기는커녕 오히려 당당하다는 평가를 받고 많은 이의 주목을 받습니다. 죄의 정도가 심할수록 옷 벗음에 대한 수치심이 무디어 집니다. 오히려 많이 벗는 것이 멋이 되고 덕이 되는 이러한 사회에서 우리의 수치심에 대한 기준도, 의식도 흐려져 가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것의 상품화로 대변되는 현대사회는 노출이 심한 옷을 입고 패션쇼에 서는 모델을 정당화시키며, 시위와 자기주장의 어필의 수단으로 하는 노출을 하는 것은 태연하게 바라봅니다. 이렇게 육체적인 노출에 대한 의식이 흐려져 가면서 우리는 진정 벗어버려야 하는 가식과 위선은 벗지 못하고 겹겹이 끼어 입는 이중성의 오류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닌지 점검해 봐야 할 것입니다. 진정 부끄럽다고 생각해야 하는 것은 딱딱하게 굳은 가식과 위선을 벗지 못하는 것입니다. 벗어야 할 것과 벗지 말아야 할 것을 분별해 내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님은 많은 군중 앞에서 자신의 옷이 벗겨지는 일을 당하였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당하였어야 마땅한 수치와 모멸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자녀이고, 주님과 같은 모습의 믿음의 사람으로서 수치와 모멸을 자랑스럽게 감당해야만 하는 우리가 오히려 앞다투어 주님의 옷을 벗기고 주님께 수치심을 입히는 그러한 모습의 신앙의 자리에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단지 주님에 대한 사랑의 고백이 입술에서 그치고, 삶과 신앙에서 비취지는 모습은 전혀 정반대로 주님을 수치스럽고 비참하게 만드는 것이 우리의 모습은 아닌지 살펴 봐야 할 것입니다.
2. 홍포 입힘을 당하였습니다.
28절의 하반절에서는 무리가 예수님께 홍포를 입히는 모습이 나옵니다. 이는 왕권에 대한조롱을 의미합니다. 주님은 만왕의 왕이며 주인이십니다. 모든 것을 통치하시는 절대 권능자이십니다. 그러나 무리는 예수님에게 홍포를 입혀 예수님의 모습을 가짜 왕, 내실 없는 허수아비로 만들고, 그 앞에 무릎을 꿇는 시늉을 하여 주님에 대한 조롱을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냅니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가 주의 앞에 무릎을 꿇는 모습은 어떠한가 돌이켜 봅니다. 진정 나의 마음을 다하여 자신을 낮추고 겸손함을 갖추어 무릎을 꿇고 있습니까? 나의 마음은 한없이 높아져 있으면서 단지 육신만 낮아져 있는 행세를 하는 것은 주님을 진실로 영광되이 높이는 아름다운 모습이 아닙니다. 이는 오히려 주님을 가짜 왕으로 취급하는 것이며 그저 이세상의 왕을 대하는 모습보다도 못한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무릎꿇음의 모습을 뒤돌아 보면서 경외해야 할 진정한 왕의 옷을 우리 손으로 벗기고 주님께 거짓의 홍포를 입히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봐야 하겠습니다.
바랍니다. 저와 여러분이 진정 주님 앞에서 낮아지고 않고, 진심을 다하여 무릎꿇지 않는다면, 이는 우리의 양 손으로 주님에게 홍포를 입히고 조롱하는 것입니다. 언제나 나의 신앙의 삶이 진정 낮아짐으로써 주님을 영광스럽게 높이는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3. 가시면류관 씌움을 당하였습니다.
29절 상반절에서 예수님은 가시 면류관을 쓰십니다. 가시면류관은 주님의 마음을 찌르는 우리의 죄의 열매를 상징합니다. 무죄한 그분이 우리를 대신하여 천국의 면류관을 두고 이 땅에서 가시면류관을 쓰셨습니다. 시와 공에 대한 무한한 권능을 지니신 그 분이 하늘의 면류관을 두고 가장 낮은 자의 형상으로 오셔서 가장 미천하고 고통스러운 면류관을 머리에 쓰셨습니다. 우리의 생각에서 비롯된 죄로 인한 고난이 주님에게 전가되어진 것입니다. 마땅히 생각해야 할 것을 생각지 못하고 마땅히 바라봐야 할 것을 바라보지 못하며, 마땅히 꿈꿔야 할 것을 꿈꾸지 못하는 우리의 잘못된 이성과 신앙과 사상으로 인한 고통을 주님은 우리를 대신하여 가시 면류관을 통하여 받았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생각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무슨 생각으로 인하여 주님의 머리가 가시면류관으로 장식된 것 입니까? 우리 믿음의 사람의 생각은 온전해야 하며 하늘의 면류관, 생명의 면류관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그릇된 생각 때문에 주님은 당신의 머리에 가시 면류관을 쓰셨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생각을 되짚고 바로잡아서 주님이 나로 인하여 더 날카로운 가시로 된 더 깊이 박히는 면류관을 쓰지 않으시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주님께서 내게 주신 사명과 명령에 따라 살아가는 아름다운 신앙의 삶을 사셔야 할 줄로 믿습니다.
4. 오른손에 갈대가 들려졌습니다.
29절 중반에서 무리가 예수님께 갈대를 들린 것은 통치권에 대한 조롱입니다. 갈대를 가지고서는 그 무엇도 명령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무리는 예수님을 나약하고 허울뿐인 자의 모습으로 만들어 주님의 통치권을 마음껏 조롱하였습니다. 우리를 다스리고 주장하시는 주님께 과연 네가 무엇을 통치하며 명령할 수 있는지를 물으며 아무것도 하지 못함을 강조하고 비웃었습니다. 이는 그 분의 근본적이고 통치권을 가장 모멸적인 방법으로 부정한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 드립니다. 이러한 조롱은 로마 병사에게만 국한되어 보이는 모습이 아닙니다. 우리의 모습을 뒤돌아 봅니다. 우리는 주님의 통치권을 인정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주님이 내게 주신 말씀을 지키기 위하여 생명을 걸고 달려가는 신앙의 삶을 살고 있습니까? 혹시 여러분은 주님의 생명의 말씀을 마치 마이동풍처럼 흘려 버리고 지나치는 것은 아닙니까? 우리가 지금 주님의 오른손에 갈대를 들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경계를 늦추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은 나의 인생의 주인이며 나의 모든 것을 다스리기 위하여 오신 참된 왕이십니다. 우리가 주님의 통치권 아래, 참된 진리와 다스림 안에 거할 때 참된 평안이 그 안에 존재할 것입니다.
5. 침뱉음을 당했습니다.
예수님의 얼굴에 침을 뱉은 것은 영혼에 수치심을 부여하는 것이며, 그 침은 우리 마음의 더러움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결코 그 더러운 침을 피하려고 얼굴을 돌리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 묵묵하게 모든 수욕을 그저 당하신 이유는 단 한가지 죄인들에게 거룩한 성인의 얼굴을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죄 없이 정결한 그 분이 더러운 침을 맞아 가며 스스로 죄인의 얼굴을 입으셨습니다. 이사야서 50장 6절을 봅니다. “나를 때린 자에게 내가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에게 내가 뺨을 맡기며 수욕과 침뱉음을 피하려고 내 얼굴을 가리우지 아니하였느니라”. 여러분 주님이 받으신 그 모욕은 우리의 영을 정결케 하기 위하여 주님이 스스로 감당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또한 주님이 받은 이 모욕과 천대는 나에게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이름을 가지고 변화된 신분을 가지는 모든 이에게 찾아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한 모욕과 수치가 우리에게 온다면 우리는 그를 피할 것이 아니며영광스럽고 자랑스럽게 감당해야 합니다. 다만, 우리가 경계를 끊이지 않아야 할 것은 우리가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당하는 수치와 모욕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의 신앙이 주님을 가해하는 자리에 위치하고 있지는 않은지 점검하고 경계하여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사도바울과 같이 주님 나라의 영광을 위하여 주님이 받으신 천대와 수치, 고통을 기꺼이 감당하고, 주님이 원하는 아름다운 신앙의 삶을 영위하면서 주님만 바라보며 나아가는 신앙을 가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