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렐루야 옆 사람과 인사하시겠습니다. 지난 한 주 동안 평안하셨습니까?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2009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새해의 복을 많이 받고 계십니까? 좀 더 지나가 봐야 아시겠지요? 2009년이 며칠 지나간 현 시점에서 아직 복을 충분히 받지 못했다고 생각을 하시는 분들 그리고 복을 받기는 했지만 더 많은 복을 받고 싶다고 생각하시는 분들 위하여 오늘 더 많은 복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드리려고 합니다. 이미 송구영신 예배를 통하여 2009년을 맞이하며 새롭게 결단한 우리 교회의 표제를 나누었으나 오늘은 보다 구체적인 실천 덕목을 함께 살펴봄으로써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더 깊은 곳으로 가라고 하신 말씀을 염두에 두면서, 특히 오늘의 본문에서 2009년 우리 교회의 많은 권속들이 더 깊은 곳으로 나아가 자리할 곳을 발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더 깊은 곳으로 나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더 깊이 나아가야 하는 장소는 어디일까요? 오늘 본문을 통하여 우리는 주님이 우리에게 더 깊이 나아가기를 원하시는 그 자리를 발견할 수 있게 됩니다.
1. 은혜의 자리로 나아가자
1절부터 4절의 말씀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새”, “주님께서 말씀을 마치시고” 등 주님의 말씀이 반복됩니다. 본문 안에서의 예수님의 모습은 베드로의 배를 청해 타시고 뭍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무리들을 향해 주님의 말씀을 선포하시고 가르침을 행하시는 모습입니다. 이를 통하여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바로 가장 깊은 은혜의 자리라 함은 말씀이 선포되는 자리라는 점입니다. 2009년에는 아버지의 말씀이 선포되는 그 자리가 가장 깊은 은혜의 자리임을 깨달아, 여러분 앞에 마련되는 은혜의 자리에는 조건 없이 달려가시기 바랍니다. 사람이 은혜 가운데 머무를 때 그에게 복이 되고 그는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것이고, 은혜의 자리에 거하지 못하면 이미 가지고 있는 은혜조차도 사라지고 말게 됩니다. 올해도 우리 교회는 신년을 맞이하여 새롭게 전인적 치유 수양회를 마련하고 전 성도들에게 참석을 권유하였습니다. 많은 분들이 오셨습니다. 왜일까요? 은혜의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주님이 은혜로 크게 역사하신 자리였습니다. 은혜의 자리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본문 중의 베드로의 모습에서 잘 드러납니다. 베드로가 거한 말씀의 자리가 그에게 얼마나 큰 은혜의 자리였는지, 그는 넘치는 은혜에 심취하였고, 그 은혜는 그의 인생이 주님을 따르는 제자로서의 삶으로 전환되는데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만일 그 자리에 베드로가 없었다면 베드로는 그의 사명을 깨닫지 못한 채 그의 조상이 그랬든 그의 남은 인생을 어부로서 살았을 것이고, 그의 자손 역시 그러한 삶을 살았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는 주님의 말씀과 함께 하여 은혜의 자리에 있었고, 스스로는 평생 찾을 수 없었을 엄청난 사명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이와 마친가지로 우리의 시작은 늘 말씀 속에 근거를 두고 있어야 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은혜가 머물기 위하여는 우선 내 안에 말씀을 사모하는 간절함이 있어야 합니다. 2009년 한 해, 아버지의 말씀으로 늘 심령가운데 더 큰 은혜의 자리가 만들어지기 바랍니다. 그 자리가 충만할 때 더 큰 주의 거룩한 일을 감당할 수 있으며 삶에 더 큰 기쁨이 자리하는 것입니다.
2. 순종의 자리로 나아가자
본문의 5절에서는 ‘내가 밤이 맞도록 수고하였으나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내가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리겠습니다’라고 대답하는 베드로가 나옵니다. 바로 말씀에 의지하여 순종한 것입니다. 순종은 말씀의 권위를 인정할 때 출발하는 것입니다. 즉 말씀을 받고 그 말씀대로 살겠다고 인정하는 모습에서 내 삶 속의 순종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성경 가운데 말씀의 권위를 인정한 대표적 인물로는 백부장이 있습니다. 병에 걸린 하인을 위하여 애원하는 백부장에게 예수님이 그럼 병을 고치러 너의 집으로 가자고 하는 순간, 백부장은 예수님의 행차를 감당하지 못하겠다고 하며 말씀만으로 족하니 말씀으로 고치소서라고 합니다. 사람인 자신의 말조차도 그의 특수한 권위와 세상적 지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을 좌지우지하는 힘을 가지고 있는데 하물며 예수님의 말씀으로 되지 않을 일은 없을 것이라 하며, 예수님의 말씀의 절대적인 힘을 인정하는 놀라운 믿음을 보였습니다. 무엇입니까? 말씀의 권위 앞에 절대적인 순종을 고백한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순종의 삶으로 이어져야 하며, 순종의 삶은 말씀의 권위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우선 되어야 합니다. 여기서 명심해야 하는 것은 나의 고유의 지식과 경험에 비추어 타당하다고 생각되어 그에 따르는 것은 순종이 아니며 단순한 동의에 지나지 않으며, 나의 환경과 조건에 합당하여 현실적으로 가능한 경우에만 인정하는 것도 순종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 상식의 범위에서 철저하게 벗어나도, 설령 현재의 나의 여건상 조금도 여의치 않다고 하더라도, 내 이성에 근거한 판단으로서는 절대로 이해가지 않는 차원의 것이라 할지라도, 주님이 그렇게 말씀하셨다는 이유만으로 ‘그리 하겠습니다’라고 순순히 움직이는 것이 진정한 순종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순종의 폭은 대단히 타협적입니다. 내가 납득이 가고 이해가 되어야만 그에 따르고, 심지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도 자신의 입장에 따라 걸러 수용하는 편의적이고 편향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이러한 형식의 순종으로는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이 체험될 수가 없습니다. 어디에서나 늘 순종하는 사람의 모습을 보면 이 세상 이치에 하나도 맞지 않고 자신의 상식과 거스르는 경우에도 순종하는 것을 봅니다. 하늘의 뜻과 땅의 섭리는 동일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늘의 뜻에 따라 나아가는 자들은 말씀을 믿고 그에 순종하여 놀라운 이적을 경험하였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모습의 순종을 행할 수 있을 때 우리는 또 한걸음 더 깊은 자리로 나아갈 수 있게 됩니다.
3. 축복의 자리로 나아가자
본문의 6절과 7절에서는 베드로의 배에 다 싣지 못할 정도, 성경 표현에 의하면 배가 거의 잠기게 되었다라고 할 정도의 많은 고기가 잡혀 야고보와 요한의 배에 나누어 싣는 모습이 나옵니다. 무엇입니까? 이와 같이 축복이라는 것은 끼쳐야 하는 것입니다. 축복이 혼자의 소유에서 그치면 이는 축복이 될 수 없으며 축복은 관계로써 퍼뜨려져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에 있어서의 축복의 바로미터는 ‘내가 얼마나 많은 것을 받았으며, 내가 얼마나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는가’가 아니라 ‘내가 얼마나 많고, 옳은 축복의 관계를 맺고 있느냐’가 되어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베드로는 평소 그의 삶을 통하여 아름다운 관계를 맺고 있었을 것입니다. 감당할 수 없는 양의 고기를 잡았으니 도와달라는 그의 손짓에 야고보와 요한은 돕기를 마다치 않았습니다. 더 깊은 축복은 더 깊은 관계로 나아감에 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관계를 아름답게 유지해야 하는 것이 축복의 발로이며, 특히 믿음의 사람이 유지해야하는 첫번째 관계는 하나님과의 관계이고 두 번째 관계는 사람과의 관계입니다. 공동체 안에서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무시한 채로 혼자서 살 수 있는 사람은 없으며, 서로를 돕고 나누며 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교회 또한 이러한 관계가 필요한 공동체의 사회입니다. 이 안에서의 관계가 아름답게 형성되어야 개인의 신앙도 아름답게 성장할 수 있고, 어느 누구라도 나눔이 불편한 모습으로 있다면 그 껄끄러움은 계속해서 자신의 믿음을 제어하게 됩니다. 그렇게 닫혀 버린 심령으로는 사랑하고 용서하고 이해하라는 말씀대로 행할 수 없으며, 그 통로를 통해서는 더 깊은 은혜의 말씀이 쏟아져 들어갈 수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믿음의 사람이 제대로 유지해야 할 세 번째의 관계는 물질과의 관계입니다. 믿음의 사람이 가져야 하는 물질관은 청지기의 물질관입니다. 내가 가진 물질은 나의 소유로서 완전히 주어진 것이 아니라 잠시의 기간 동안 임시로 내게 맡겨진 것입니다. 그것은 나 혼자의 삶을 위하여 허락하신 것이 아니므로,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과 많은 이의 구제를 위하여 사용되어 하며, 우리는 마지막 순간에 물질로 인하여 하나님께 심판받지 않도록 하여야 합니다. 이를 마음에 새기어 2009년 이러한 축복의 자리로 나아가는 여러분과 제가 되기를 바랍니다.
4. 고백의 자리로 나아가자
본문의 8절과 9절에서 베드로는 ‘나는 죄인이니 나를 떠나소서’라고 주님께 말합니다. 여러분, 인생은 혼자의 힘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스스로 구원에 이를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내 인생의 주연을 내가 아닌 주님으로 받아들이고 영접할 때 그 인생은 참된 축복의 삶으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평생 고기만 잡아 온 사람입니다. 그러한 그가 얼마나 큰 죄를 지었기에 주님 앞에 엎드려 죄인임을 절실히 고백했을까요? 베드로가 깨달은 자신의 죄는 자신의 삶의 주인이 자신이라고 생각했던 지금까지의 교만이었습니다. 자신이 가지지 못한 놀라운 능력을 가진 주님과 주님의 말씀에 의하여 지금까지 자기자신만을 인생의 전부라고 생각했던 자신의 짧은 소견과 무능함, 그리고 부끄러움을 깨달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깨달음과 고백을 통하여 그는 주님이 말씀하시는 은혜와 순종과 축복의 자리에 들어설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내 인생을 내 것이라고 여기며 사는 것은 마지막 때에 가장 크게 심판 받을 큰 죄입니다. 내 인생은 나를 창조하신 주님의 것이고 주님을 위하여 사는 것이 참된 인생의 본연인 것입니다. 베드로는 여태 세상을 지배하는 세상의 법칙에 의하여 살았습니다. 이는 중력의 힘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베드로가 주님과의 만남과 고백을 통하여 자신을 중심으로 하여 세상이 돌아가고 있다는 자기중심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중력의 힘이 아닌 은혜의 힘으로 살게 되었습니다.
사명을 가지지 않고 이 땅에 보내진 사람은 단 한명도 없습니다. 사명은 곧 인생의 목적이며 사명의 발견은 인생에 있어 최고의 가치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소중한 배와 소유한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좇은 베드로와 요한은 무엇보다도 의미 있는 인생 최고의 가치를 좇은 것입니다. 그들은 언제나와 같이 고기를 잡기 위하여 그물을 씻으며 준비했던 자신의 내일을 과감히 내려놓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무엇입니까? 그들은 자신의 사명을 발견한 것입니다. 자신의 인생을 통틀어 이루어내야 하는 사명은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자신의 인생의 참 목적임을 깨달았기에 주님의 뒤를 따르기를 주저치 않았습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우리의 사명은 무엇일까요? 기억하십시오. 베드로가 자신의 사명을 깨닫게 된 주님의 말씀은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내가 나의 본업이라고 여겨 소중히 왔던 나의 직장과 학업, 나의 가정은 나의 부업이 되어야 하며 나의 본업은 사람을 낚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은 모든 믿음의 사람을 주님의 증인으로 세우셨으며, 베드로의 사명과 마찬가지로 우리 주님이 하셨던 그 일을 내가 쫒아 하는 것이 나의 사명입니다. 주님이 보내신 성령에 충만한 모습으로 세상으로 나아가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기를 바라는 주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여러분께 말씀드립니다. 2009년의 우리 교회의 표어는 ‘더 깊은 곳으로 나아가라’이며 구체적인 실천덕목으로는 ‘더 깊은 은혜의 자리로 나아가라’ ‘더 깊은 순종의 자리로 나아가라’ ‘더 깊은 축복의 자리로 나아가라’ ‘더 깊은 사명의 자리로 나아가라’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2009년을 이들 표어와 실천덕목과 함께 함으로서 그 어떤 해보다 주님이 바라시는 사명을 훌륭히 감당할 수 있고, 그로 인하여 가장 복되고 축복받는 아름다운 한 해로 만들어 나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옆 사람과 인사하시겠습니다. 지난 한 주 동안 평안하셨습니까?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2009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새해의 복을 많이 받고 계십니까? 좀 더 지나가 봐야 아시겠지요? 2009년이 며칠 지나간 현 시점에서 아직 복을 충분히 받지 못했다고 생각을 하시는 분들 그리고 복을 받기는 했지만 더 많은 복을 받고 싶다고 생각하시는 분들 위하여 오늘 더 많은 복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드리려고 합니다. 이미 송구영신 예배를 통하여 2009년을 맞이하며 새롭게 결단한 우리 교회의 표제를 나누었으나 오늘은 보다 구체적인 실천 덕목을 함께 살펴봄으로써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더 깊은 곳으로 가라고 하신 말씀을 염두에 두면서, 특히 오늘의 본문에서 2009년 우리 교회의 많은 권속들이 더 깊은 곳으로 나아가 자리할 곳을 발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더 깊은 곳으로 나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더 깊이 나아가야 하는 장소는 어디일까요? 오늘 본문을 통하여 우리는 주님이 우리에게 더 깊이 나아가기를 원하시는 그 자리를 발견할 수 있게 됩니다.
1. 은혜의 자리로 나아가자
1절부터 4절의 말씀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새”, “주님께서 말씀을 마치시고” 등 주님의 말씀이 반복됩니다. 본문 안에서의 예수님의 모습은 베드로의 배를 청해 타시고 뭍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무리들을 향해 주님의 말씀을 선포하시고 가르침을 행하시는 모습입니다. 이를 통하여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바로 가장 깊은 은혜의 자리라 함은 말씀이 선포되는 자리라는 점입니다. 2009년에는 아버지의 말씀이 선포되는 그 자리가 가장 깊은 은혜의 자리임을 깨달아, 여러분 앞에 마련되는 은혜의 자리에는 조건 없이 달려가시기 바랍니다. 사람이 은혜 가운데 머무를 때 그에게 복이 되고 그는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것이고, 은혜의 자리에 거하지 못하면 이미 가지고 있는 은혜조차도 사라지고 말게 됩니다. 올해도 우리 교회는 신년을 맞이하여 새롭게 전인적 치유 수양회를 마련하고 전 성도들에게 참석을 권유하였습니다. 많은 분들이 오셨습니다. 왜일까요? 은혜의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주님이 은혜로 크게 역사하신 자리였습니다. 은혜의 자리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본문 중의 베드로의 모습에서 잘 드러납니다. 베드로가 거한 말씀의 자리가 그에게 얼마나 큰 은혜의 자리였는지, 그는 넘치는 은혜에 심취하였고, 그 은혜는 그의 인생이 주님을 따르는 제자로서의 삶으로 전환되는데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만일 그 자리에 베드로가 없었다면 베드로는 그의 사명을 깨닫지 못한 채 그의 조상이 그랬든 그의 남은 인생을 어부로서 살았을 것이고, 그의 자손 역시 그러한 삶을 살았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는 주님의 말씀과 함께 하여 은혜의 자리에 있었고, 스스로는 평생 찾을 수 없었을 엄청난 사명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이와 마친가지로 우리의 시작은 늘 말씀 속에 근거를 두고 있어야 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은혜가 머물기 위하여는 우선 내 안에 말씀을 사모하는 간절함이 있어야 합니다. 2009년 한 해, 아버지의 말씀으로 늘 심령가운데 더 큰 은혜의 자리가 만들어지기 바랍니다. 그 자리가 충만할 때 더 큰 주의 거룩한 일을 감당할 수 있으며 삶에 더 큰 기쁨이 자리하는 것입니다.
2. 순종의 자리로 나아가자
본문의 5절에서는 ‘내가 밤이 맞도록 수고하였으나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내가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리겠습니다’라고 대답하는 베드로가 나옵니다. 바로 말씀에 의지하여 순종한 것입니다. 순종은 말씀의 권위를 인정할 때 출발하는 것입니다. 즉 말씀을 받고 그 말씀대로 살겠다고 인정하는 모습에서 내 삶 속의 순종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성경 가운데 말씀의 권위를 인정한 대표적 인물로는 백부장이 있습니다. 병에 걸린 하인을 위하여 애원하는 백부장에게 예수님이 그럼 병을 고치러 너의 집으로 가자고 하는 순간, 백부장은 예수님의 행차를 감당하지 못하겠다고 하며 말씀만으로 족하니 말씀으로 고치소서라고 합니다. 사람인 자신의 말조차도 그의 특수한 권위와 세상적 지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을 좌지우지하는 힘을 가지고 있는데 하물며 예수님의 말씀으로 되지 않을 일은 없을 것이라 하며, 예수님의 말씀의 절대적인 힘을 인정하는 놀라운 믿음을 보였습니다. 무엇입니까? 말씀의 권위 앞에 절대적인 순종을 고백한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순종의 삶으로 이어져야 하며, 순종의 삶은 말씀의 권위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우선 되어야 합니다. 여기서 명심해야 하는 것은 나의 고유의 지식과 경험에 비추어 타당하다고 생각되어 그에 따르는 것은 순종이 아니며 단순한 동의에 지나지 않으며, 나의 환경과 조건에 합당하여 현실적으로 가능한 경우에만 인정하는 것도 순종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 상식의 범위에서 철저하게 벗어나도, 설령 현재의 나의 여건상 조금도 여의치 않다고 하더라도, 내 이성에 근거한 판단으로서는 절대로 이해가지 않는 차원의 것이라 할지라도, 주님이 그렇게 말씀하셨다는 이유만으로 ‘그리 하겠습니다’라고 순순히 움직이는 것이 진정한 순종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순종의 폭은 대단히 타협적입니다. 내가 납득이 가고 이해가 되어야만 그에 따르고, 심지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도 자신의 입장에 따라 걸러 수용하는 편의적이고 편향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이러한 형식의 순종으로는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이 체험될 수가 없습니다. 어디에서나 늘 순종하는 사람의 모습을 보면 이 세상 이치에 하나도 맞지 않고 자신의 상식과 거스르는 경우에도 순종하는 것을 봅니다. 하늘의 뜻과 땅의 섭리는 동일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늘의 뜻에 따라 나아가는 자들은 말씀을 믿고 그에 순종하여 놀라운 이적을 경험하였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모습의 순종을 행할 수 있을 때 우리는 또 한걸음 더 깊은 자리로 나아갈 수 있게 됩니다.
3. 축복의 자리로 나아가자
본문의 6절과 7절에서는 베드로의 배에 다 싣지 못할 정도, 성경 표현에 의하면 배가 거의 잠기게 되었다라고 할 정도의 많은 고기가 잡혀 야고보와 요한의 배에 나누어 싣는 모습이 나옵니다. 무엇입니까? 이와 같이 축복이라는 것은 끼쳐야 하는 것입니다. 축복이 혼자의 소유에서 그치면 이는 축복이 될 수 없으며 축복은 관계로써 퍼뜨려져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에 있어서의 축복의 바로미터는 ‘내가 얼마나 많은 것을 받았으며, 내가 얼마나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는가’가 아니라 ‘내가 얼마나 많고, 옳은 축복의 관계를 맺고 있느냐’가 되어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베드로는 평소 그의 삶을 통하여 아름다운 관계를 맺고 있었을 것입니다. 감당할 수 없는 양의 고기를 잡았으니 도와달라는 그의 손짓에 야고보와 요한은 돕기를 마다치 않았습니다. 더 깊은 축복은 더 깊은 관계로 나아감에 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관계를 아름답게 유지해야 하는 것이 축복의 발로이며, 특히 믿음의 사람이 유지해야하는 첫번째 관계는 하나님과의 관계이고 두 번째 관계는 사람과의 관계입니다. 공동체 안에서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무시한 채로 혼자서 살 수 있는 사람은 없으며, 서로를 돕고 나누며 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교회 또한 이러한 관계가 필요한 공동체의 사회입니다. 이 안에서의 관계가 아름답게 형성되어야 개인의 신앙도 아름답게 성장할 수 있고, 어느 누구라도 나눔이 불편한 모습으로 있다면 그 껄끄러움은 계속해서 자신의 믿음을 제어하게 됩니다. 그렇게 닫혀 버린 심령으로는 사랑하고 용서하고 이해하라는 말씀대로 행할 수 없으며, 그 통로를 통해서는 더 깊은 은혜의 말씀이 쏟아져 들어갈 수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믿음의 사람이 제대로 유지해야 할 세 번째의 관계는 물질과의 관계입니다. 믿음의 사람이 가져야 하는 물질관은 청지기의 물질관입니다. 내가 가진 물질은 나의 소유로서 완전히 주어진 것이 아니라 잠시의 기간 동안 임시로 내게 맡겨진 것입니다. 그것은 나 혼자의 삶을 위하여 허락하신 것이 아니므로,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과 많은 이의 구제를 위하여 사용되어 하며, 우리는 마지막 순간에 물질로 인하여 하나님께 심판받지 않도록 하여야 합니다. 이를 마음에 새기어 2009년 이러한 축복의 자리로 나아가는 여러분과 제가 되기를 바랍니다.
4. 고백의 자리로 나아가자
본문의 8절과 9절에서 베드로는 ‘나는 죄인이니 나를 떠나소서’라고 주님께 말합니다. 여러분, 인생은 혼자의 힘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스스로 구원에 이를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내 인생의 주연을 내가 아닌 주님으로 받아들이고 영접할 때 그 인생은 참된 축복의 삶으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평생 고기만 잡아 온 사람입니다. 그러한 그가 얼마나 큰 죄를 지었기에 주님 앞에 엎드려 죄인임을 절실히 고백했을까요? 베드로가 깨달은 자신의 죄는 자신의 삶의 주인이 자신이라고 생각했던 지금까지의 교만이었습니다. 자신이 가지지 못한 놀라운 능력을 가진 주님과 주님의 말씀에 의하여 지금까지 자기자신만을 인생의 전부라고 생각했던 자신의 짧은 소견과 무능함, 그리고 부끄러움을 깨달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깨달음과 고백을 통하여 그는 주님이 말씀하시는 은혜와 순종과 축복의 자리에 들어설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내 인생을 내 것이라고 여기며 사는 것은 마지막 때에 가장 크게 심판 받을 큰 죄입니다. 내 인생은 나를 창조하신 주님의 것이고 주님을 위하여 사는 것이 참된 인생의 본연인 것입니다. 베드로는 여태 세상을 지배하는 세상의 법칙에 의하여 살았습니다. 이는 중력의 힘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베드로가 주님과의 만남과 고백을 통하여 자신을 중심으로 하여 세상이 돌아가고 있다는 자기중심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중력의 힘이 아닌 은혜의 힘으로 살게 되었습니다.
사명을 가지지 않고 이 땅에 보내진 사람은 단 한명도 없습니다. 사명은 곧 인생의 목적이며 사명의 발견은 인생에 있어 최고의 가치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소중한 배와 소유한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좇은 베드로와 요한은 무엇보다도 의미 있는 인생 최고의 가치를 좇은 것입니다. 그들은 언제나와 같이 고기를 잡기 위하여 그물을 씻으며 준비했던 자신의 내일을 과감히 내려놓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무엇입니까? 그들은 자신의 사명을 발견한 것입니다. 자신의 인생을 통틀어 이루어내야 하는 사명은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자신의 인생의 참 목적임을 깨달았기에 주님의 뒤를 따르기를 주저치 않았습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우리의 사명은 무엇일까요? 기억하십시오. 베드로가 자신의 사명을 깨닫게 된 주님의 말씀은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내가 나의 본업이라고 여겨 소중히 왔던 나의 직장과 학업, 나의 가정은 나의 부업이 되어야 하며 나의 본업은 사람을 낚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은 모든 믿음의 사람을 주님의 증인으로 세우셨으며, 베드로의 사명과 마찬가지로 우리 주님이 하셨던 그 일을 내가 쫒아 하는 것이 나의 사명입니다. 주님이 보내신 성령에 충만한 모습으로 세상으로 나아가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기를 바라는 주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여러분께 말씀드립니다. 2009년의 우리 교회의 표어는 ‘더 깊은 곳으로 나아가라’이며 구체적인 실천덕목으로는 ‘더 깊은 은혜의 자리로 나아가라’ ‘더 깊은 순종의 자리로 나아가라’ ‘더 깊은 축복의 자리로 나아가라’ ‘더 깊은 사명의 자리로 나아가라’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2009년을 이들 표어와 실천덕목과 함께 함으로서 그 어떤 해보다 주님이 바라시는 사명을 훌륭히 감당할 수 있고, 그로 인하여 가장 복되고 축복받는 아름다운 한 해로 만들어 나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