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11.16 주일오전예배
본문 : 마태복음 26장 36-46절
제목 : 일어나라 같이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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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37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쌔 고민하고 슬퍼하사 38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39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40 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 동안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41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42 다시 두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 43 다시 오사 보신즉 저희가 자니 이는 저희 눈이 피곤함일러라 44 또 저희를 두시고 나아가 세번째 동일한 말씀으로 기도하신 후 45 이에 제자들에게 오사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보라 때가 가까웠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우느니라 46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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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지난 3주에 이어 동일한 본문으로, “일어나 함께 가자”라는 주님의 말씀 속에 우리에게 주님께서 던져 주시는 의미들을 생각하며 은혜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1. 동행하자는 것입니다.
“일어나라 함께 가자” 라고 하는 것은 곧 나와 함께 동행하기 원하시는 주님의 모습입니다. 곧, 나와 같이 가자는 동행의 축복인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동행하시는 모습에서 바라볼 수 있는 것은, 그 동행의 의지가 우리의 모습과는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항상 동행해 주십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의 동행의 의지는 당신의 감정에 좌우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만약 주님이 당신의 감정에 의해 지배 받는 분이었다면 세 번씩이나 당신을 위해 기도하라고 했는데도 자고 있는 제자들을 향해 어떻게 마음 편하게 “일어나라 함께 가자”라고 할 수 있었겠습니까? 주님은 절대 자신의 감정에 의해 지배되지 않고, 당신이 택한 백성, 당신이 부르신 자, 그리고 지금은 연약하여 잘 수밖에 없지만 나중에 그들이 온전케 서서 이룰 놀라운 일들을 비전으로 바라보셨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들을 향해서 일어나라 함께 가자라고 외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우리의 현재의 상황에 의해 지배를 받습니다. 주님이 “일어나라 함께 가자”라고 하시는데, 우리는 “주님, 제가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 주님이 기도하자고 하실 때 기도하지도 못했던 내가 어떻게 갈 수가 있겠습니까. 주님, 안됩니다. 못 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라고 말하며 내 상태에 의해 주님의 말씀까지도 저버립니다. 우리는 이런 신앙에서 벗어나야 됩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상태를 모르셔서 일어나 함께 가자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주님을 따라갈 자격조차도 없는 사람들인 것을 너무나 잘 아시는데도 불구하고 함께 가자고 말씀하시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우리는 우리의 곤비하고 지친 삶 속에서, “주님, 지금은 아닙니다”라고 말하며 사양의 의지를 주님 앞에 표명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 있으려고 합니다. 주님이 우리의 형편, 처지와 우리의 지금 모습을 모르셔서 일어나서 함께 가자고 말씀하신 것입니까? 우리에게 부족한 모습이 있지만, 주님의 기대치에 부응하지도 못했지만, 주님이 가자 하실 때에 아멘하고 주님이 내밀어 주신 그 손을 붙잡고 가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또 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인생의 삶도 힘겹지만 계속해서 걸어가는 것이 우리의 믿음이요 신앙인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께서 나와 동행하심에 확신이 있으므로 오늘의 삶에 발을 내디뎌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감당해야 할 놀라운 사명을 주님께서 미리 바라보시고 지금 침체되어 있는 그 상황 속에서 여러분을 불러 일으키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어나야 합니다. 힘들지만 일어나야 합니다. 괴롭지만 일어나 걸어가는 것이 우리 신앙의 길인 것입니다. 여러분, 삶 가운데 내가 가는 길이 힘들고 어려워도, 주님께서 내 고통을 아시고 내 힘든 삶을 알아주신다는 그 믿음이 있으므로 우리는 오늘의 신앙의 삶을 걸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피곤하고 지친 육체와 심령의 상태까지도 알고 계시지만, 그래도 일어나 가야 할 자리가 있다는 사실을 주님께서는 이 본문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주님의 초청에 우리가 응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동행하자는, 나와 함께 가자는 그 손을 겸손히 붙잡고 주님의 일으킴에 의해서 나 자신이 일어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당신의 사역으로의 초대에 아멘하고 응하는 것이 우리의 삶과 신앙의 가장 중요한 모습입니다.
2. 현재의 자리에서 일어서라는 것입니다.
“일어나라 함께 가자”라는 것은 지금 나의 현재의 자리에서 일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있었던 자리가 어디입니까? 잠에 취해 있는 자리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육신의 연약함을 100% 드러낸 모습으로 그 자리에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제자들의 잠에 취해 있는 모습 속에서, 나는 어디에 어떤 자세로 지쳐 누워 자고 있는지 살펴야 합니다. 내가 어느 곳에서 깊이 잠들어 있는지에 대한 영적인 각성이 우리 안에 있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나의 게으름일 수 있습니다. 나의 연약함일 수 있습니다. 나의 분주함일 수 있습니다. 나의 오만함일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것들이 주님이 일을 이루지 못하게 합니다. 또한, 내가 영적으로 침체한 자리가 어디인가 생각해 보십시오. 기도해야 할 사람이 기도하지 않습니다. 말씀을 보아야 하는데 말씀이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예배해야 하는데 예배의 감격에 빠지지 못합니다. 봉사해야 하는데 손과 발이 얼어붙었습니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영적인 침체 가운데 계속 누워 있기만 하는 그 모습이 우리의 영적 삶의 모습이 아닌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주님은, 그 자리가 우리가 계속 누워있어야 할 자리가 아니기 때문에, 일어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반면, 주님은 기도의 자리에 계셨지만 그 자리에서 일어나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왜 그 기도의 자리에서 일어나셨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기도의 자리가 우리의 최종의 자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아버지의 뜻을 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의 자리가 마지막 자리라고 착각하고, 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기도했으니까 됐다고 생각하며 그냥 그 자리에 머물러 있습니다. 주님은 그 자리에서 일어나셨습니다. 주님은 당신을 잡으러 온 사람들이 가까이 왔다는 것을 알고 계셨고, 그 기도의 자리에 계속 앉아 있었어도 사람들이 예수님을 잡아갔을 것이라는 것도 미리 알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왜 굳이 제자들에게 “일어나라 함께 가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그것은 기도의 자리가 우리의 최종의 자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약 아직까지도 내 신앙의 삶 가운데서, 기도했으니까 됐고 기도의 자리가 내 마지막 자리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온전한 깨달음 가운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최종 자리는 사명으로 일어나 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기도는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의무이고, 의무를 다한 사람은 사명의 자리로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로서 의무의 자리를 채웠다면, 다음 단계는 우리가 가야 할 사명의 자리로 발을 내딛는 것입니다. 기도의 자리는 하나님의 뜻과 나의 뜻의 합의점을 창출해 내는 것이고, 그 뜻이 이루어졌으면 이제 일어나서 나에게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는 자리로 나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곧 부름 받은 그 자리로 가야 하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어디서 어디로 부르셨는지 깨닫고 그 부르심의 자리로 겸허히 달려가지 않으면 안됩니다.
3. 부름 받은 자리로 가자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일어나라 함께 가자”라고 하는 것은 부름 받은 자리로 가자는 말씀입니다.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복음의 자리가 우리의 최종의 자리임을 믿습니다. 나의 삶의 현장이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자리이며, 바로 그 곳에서 주님은 오늘도 나를 부르시고 계십니다. 곧, 우리 안에 아버지의 거룩한 뜻이 일어나기를 원하는 간절한 소원을 가지시고 우리를 지금의 삶의 현장으로 불러주신 것입니다. 주님은 자신의 자리가 당신의 생명을 내어놓고 가야 할 십자가의 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곳이 당신의 부름의 자리임을 알고 그대로 진행해 나가심으로 당신의 사명을 죽음으로 감당하셨습니다. 의심 많던 도마도 인도까지 가서 순교의 피를 흘렸습니다. 바울과 베드로도 로마에서 순교의 피를 흘렸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디로 부름을 받았는가, 나의 마지막 피를 흘릴 곳이 어디인가, 내가 마지막 숨을 쉬고 거두어야 할 곳이 어디인가에 대해서 분명히 인식하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사는 곳이 지금 주님이 나를 부르고 계시는 자리인가에 대한 분명한 대답이 발견되어야 합니다. 주님께 부름 받은 그 곳을 발견한 사람만이 그 곳에서 충분한 피를 흘릴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어디로 부르셨습니까? 주님께서는 왜 우리를 많은 곳 중에서 이 땅에 보내셨습니까? 이 땅 가운데 나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구원하기 원하시는 생명이 있음을 우리는 믿음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막연하게 내 직업을 위해서, 내 장래의 대물을 위해서 이 곳으로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이 땅에 부르신 것은, 하나님께서 이끄시기 원하셨던 또 한 누군가를 향한 부르심을 내 삶의 현장에서 이루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내가 뿌리 내리고 있는 삶의 현장이 얼마나 중요한 장소인지 모릅니다. 여러분이 지금 서 있는 그 곳은 여러분의 사명의 현지입니다. 그 곳이 여러분의 직장이 되었던, 학교가 되었던, 가정이 되었던, 그 곳은 주님의 부르심에 응하고 내게 주어진 사명을 온전히 감당해야 할 자리인 것입니다. 주님께서, 잠들어 지쳐있는 제자들을 향해 일어나 함께 가자며 부르십니다. 지금도 우리를 향해 “일어나라 함께 가자”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이 우리의 귀에 들려 옵니다.
본문 : 마태복음 26장 36-46절
제목 : 일어나라 같이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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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37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쌔 고민하고 슬퍼하사 38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39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40 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 동안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41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42 다시 두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 43 다시 오사 보신즉 저희가 자니 이는 저희 눈이 피곤함일러라 44 또 저희를 두시고 나아가 세번째 동일한 말씀으로 기도하신 후 45 이에 제자들에게 오사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보라 때가 가까웠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우느니라 46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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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지난 3주에 이어 동일한 본문으로, “일어나 함께 가자”라는 주님의 말씀 속에 우리에게 주님께서 던져 주시는 의미들을 생각하며 은혜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1. 동행하자는 것입니다.
“일어나라 함께 가자” 라고 하는 것은 곧 나와 함께 동행하기 원하시는 주님의 모습입니다. 곧, 나와 같이 가자는 동행의 축복인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동행하시는 모습에서 바라볼 수 있는 것은, 그 동행의 의지가 우리의 모습과는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항상 동행해 주십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의 동행의 의지는 당신의 감정에 좌우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만약 주님이 당신의 감정에 의해 지배 받는 분이었다면 세 번씩이나 당신을 위해 기도하라고 했는데도 자고 있는 제자들을 향해 어떻게 마음 편하게 “일어나라 함께 가자”라고 할 수 있었겠습니까? 주님은 절대 자신의 감정에 의해 지배되지 않고, 당신이 택한 백성, 당신이 부르신 자, 그리고 지금은 연약하여 잘 수밖에 없지만 나중에 그들이 온전케 서서 이룰 놀라운 일들을 비전으로 바라보셨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들을 향해서 일어나라 함께 가자라고 외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우리의 현재의 상황에 의해 지배를 받습니다. 주님이 “일어나라 함께 가자”라고 하시는데, 우리는 “주님, 제가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 주님이 기도하자고 하실 때 기도하지도 못했던 내가 어떻게 갈 수가 있겠습니까. 주님, 안됩니다. 못 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라고 말하며 내 상태에 의해 주님의 말씀까지도 저버립니다. 우리는 이런 신앙에서 벗어나야 됩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상태를 모르셔서 일어나 함께 가자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주님을 따라갈 자격조차도 없는 사람들인 것을 너무나 잘 아시는데도 불구하고 함께 가자고 말씀하시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우리는 우리의 곤비하고 지친 삶 속에서, “주님, 지금은 아닙니다”라고 말하며 사양의 의지를 주님 앞에 표명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 있으려고 합니다. 주님이 우리의 형편, 처지와 우리의 지금 모습을 모르셔서 일어나서 함께 가자고 말씀하신 것입니까? 우리에게 부족한 모습이 있지만, 주님의 기대치에 부응하지도 못했지만, 주님이 가자 하실 때에 아멘하고 주님이 내밀어 주신 그 손을 붙잡고 가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또 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인생의 삶도 힘겹지만 계속해서 걸어가는 것이 우리의 믿음이요 신앙인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께서 나와 동행하심에 확신이 있으므로 오늘의 삶에 발을 내디뎌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감당해야 할 놀라운 사명을 주님께서 미리 바라보시고 지금 침체되어 있는 그 상황 속에서 여러분을 불러 일으키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어나야 합니다. 힘들지만 일어나야 합니다. 괴롭지만 일어나 걸어가는 것이 우리 신앙의 길인 것입니다. 여러분, 삶 가운데 내가 가는 길이 힘들고 어려워도, 주님께서 내 고통을 아시고 내 힘든 삶을 알아주신다는 그 믿음이 있으므로 우리는 오늘의 신앙의 삶을 걸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피곤하고 지친 육체와 심령의 상태까지도 알고 계시지만, 그래도 일어나 가야 할 자리가 있다는 사실을 주님께서는 이 본문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주님의 초청에 우리가 응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동행하자는, 나와 함께 가자는 그 손을 겸손히 붙잡고 주님의 일으킴에 의해서 나 자신이 일어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당신의 사역으로의 초대에 아멘하고 응하는 것이 우리의 삶과 신앙의 가장 중요한 모습입니다.
2. 현재의 자리에서 일어서라는 것입니다.
“일어나라 함께 가자”라는 것은 지금 나의 현재의 자리에서 일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있었던 자리가 어디입니까? 잠에 취해 있는 자리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육신의 연약함을 100% 드러낸 모습으로 그 자리에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제자들의 잠에 취해 있는 모습 속에서, 나는 어디에 어떤 자세로 지쳐 누워 자고 있는지 살펴야 합니다. 내가 어느 곳에서 깊이 잠들어 있는지에 대한 영적인 각성이 우리 안에 있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나의 게으름일 수 있습니다. 나의 연약함일 수 있습니다. 나의 분주함일 수 있습니다. 나의 오만함일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것들이 주님이 일을 이루지 못하게 합니다. 또한, 내가 영적으로 침체한 자리가 어디인가 생각해 보십시오. 기도해야 할 사람이 기도하지 않습니다. 말씀을 보아야 하는데 말씀이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예배해야 하는데 예배의 감격에 빠지지 못합니다. 봉사해야 하는데 손과 발이 얼어붙었습니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영적인 침체 가운데 계속 누워 있기만 하는 그 모습이 우리의 영적 삶의 모습이 아닌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주님은, 그 자리가 우리가 계속 누워있어야 할 자리가 아니기 때문에, 일어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반면, 주님은 기도의 자리에 계셨지만 그 자리에서 일어나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왜 그 기도의 자리에서 일어나셨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기도의 자리가 우리의 최종의 자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아버지의 뜻을 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의 자리가 마지막 자리라고 착각하고, 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기도했으니까 됐다고 생각하며 그냥 그 자리에 머물러 있습니다. 주님은 그 자리에서 일어나셨습니다. 주님은 당신을 잡으러 온 사람들이 가까이 왔다는 것을 알고 계셨고, 그 기도의 자리에 계속 앉아 있었어도 사람들이 예수님을 잡아갔을 것이라는 것도 미리 알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왜 굳이 제자들에게 “일어나라 함께 가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그것은 기도의 자리가 우리의 최종의 자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약 아직까지도 내 신앙의 삶 가운데서, 기도했으니까 됐고 기도의 자리가 내 마지막 자리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온전한 깨달음 가운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최종 자리는 사명으로 일어나 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기도는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의무이고, 의무를 다한 사람은 사명의 자리로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로서 의무의 자리를 채웠다면, 다음 단계는 우리가 가야 할 사명의 자리로 발을 내딛는 것입니다. 기도의 자리는 하나님의 뜻과 나의 뜻의 합의점을 창출해 내는 것이고, 그 뜻이 이루어졌으면 이제 일어나서 나에게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는 자리로 나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곧 부름 받은 그 자리로 가야 하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어디서 어디로 부르셨는지 깨닫고 그 부르심의 자리로 겸허히 달려가지 않으면 안됩니다.
3. 부름 받은 자리로 가자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일어나라 함께 가자”라고 하는 것은 부름 받은 자리로 가자는 말씀입니다.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복음의 자리가 우리의 최종의 자리임을 믿습니다. 나의 삶의 현장이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자리이며, 바로 그 곳에서 주님은 오늘도 나를 부르시고 계십니다. 곧, 우리 안에 아버지의 거룩한 뜻이 일어나기를 원하는 간절한 소원을 가지시고 우리를 지금의 삶의 현장으로 불러주신 것입니다. 주님은 자신의 자리가 당신의 생명을 내어놓고 가야 할 십자가의 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곳이 당신의 부름의 자리임을 알고 그대로 진행해 나가심으로 당신의 사명을 죽음으로 감당하셨습니다. 의심 많던 도마도 인도까지 가서 순교의 피를 흘렸습니다. 바울과 베드로도 로마에서 순교의 피를 흘렸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디로 부름을 받았는가, 나의 마지막 피를 흘릴 곳이 어디인가, 내가 마지막 숨을 쉬고 거두어야 할 곳이 어디인가에 대해서 분명히 인식하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사는 곳이 지금 주님이 나를 부르고 계시는 자리인가에 대한 분명한 대답이 발견되어야 합니다. 주님께 부름 받은 그 곳을 발견한 사람만이 그 곳에서 충분한 피를 흘릴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어디로 부르셨습니까? 주님께서는 왜 우리를 많은 곳 중에서 이 땅에 보내셨습니까? 이 땅 가운데 나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구원하기 원하시는 생명이 있음을 우리는 믿음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막연하게 내 직업을 위해서, 내 장래의 대물을 위해서 이 곳으로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이 땅에 부르신 것은, 하나님께서 이끄시기 원하셨던 또 한 누군가를 향한 부르심을 내 삶의 현장에서 이루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내가 뿌리 내리고 있는 삶의 현장이 얼마나 중요한 장소인지 모릅니다. 여러분이 지금 서 있는 그 곳은 여러분의 사명의 현지입니다. 그 곳이 여러분의 직장이 되었던, 학교가 되었던, 가정이 되었던, 그 곳은 주님의 부르심에 응하고 내게 주어진 사명을 온전히 감당해야 할 자리인 것입니다. 주님께서, 잠들어 지쳐있는 제자들을 향해 일어나 함께 가자며 부르십니다. 지금도 우리를 향해 “일어나라 함께 가자”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이 우리의 귀에 들려 옵니다.
녹취: 오지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