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2 |
2007.7.8.주일오전예배설교(언제나 존재하는 세 사람 - 유1:17-23)
|
김용수목사 |
2007-07-08 |
9452 |
261 |
2009.7.1 수요예배 설교말씀 (ヨハネによる福音書 10:7-18/요한복음강해)
|
정장수 |
2009-07-01 |
9477 |
260 |
2008.11.30. 주일오전예배(마26:47-56)군호의 입맞춤
1
|
김용수목사 |
2008-12-01 |
9489 |
259 |
2009.8.2 주일 설교말씀 (행(使徒言行錄)14:19-28/루스드라에서의 이후)
|
정장수 |
2009-08-02 |
9496 |
258 |
2013. 2. 17 주일오후예배 김용수목사 설교
|
안재석전도사 |
2013-02-20 |
9503 |
257 |
2013년 1월 13일 주일오전예배 사도행전 19:1~7, 성령을 받았느냐?
|
안재석전도사 |
2013-01-20 |
9509 |
256 |
2009.5.31 주일 설교말씀 (행(使徒行傳)4:32-35/우리는 가족입이다)
2
|
정장수 |
2009-05-31 |
9513 |
255 |
2009.4.26 주일 찬양예배 설교말씀 (잠언箴言 23:4-5/1100세계비전)
|
정장수 |
2009-04-26 |
9514 |
254 |
2012~2013 송구영신예배
|
안재석전도사 |
2013-01-20 |
9520 |
253 |
2009.8.16 주일 찬양예배 설교말씀 (잠언箴言 24:8-10/솔로몬의 잠언)
|
정장수 |
2009-08-16 |
9532 |
252 |
2013. 2. 10 동경한인장로교회 오전예배 설교:김용수목사
|
안재석전도사 |
2013-02-13 |
9544 |
251 |
2013. 03. 17 주일오후예배 김 산 전도사 설교
2
|
안재석전도사 |
2013-03-22 |
9564 |
250 |
2013. 04 . 14 주일오전배 김용수목사 설교(천국에서 큰 자입니까? 마18:1-14)
|
안재석전도사 |
2013-04-18 |
9568 |
249 |
2009.7.12주일 설교말씀 (행(使徒言行錄)14:8-18/루스드라에서의 교훈4)
|
정장수 |
2009-07-12 |
9574 |
248 |
2009.5.31 주일 찬양예배 설교말씀 (잠언箴言 23:17-18/솔로몬의 잠언)
|
정장수 |
2009-05-31 |
9589 |
247 |
2013. 03. 17 주일오전예배 장성준목사 설교
|
안재석전도사 |
2013-03-22 |
9592 |
246 |
2013. 10. 06 동경연합장로교회 주일오전예배 김용수목사 설교
|
안재석전도사 |
2013-10-07 |
9602 |
245 |
2010.2.7 주일 설교
|
정장수 |
2010-04-10 |
9603 |
244 |
2009.11.29 주일 설교 (행使徒言行錄16:27-34 당신은 무엇으로 기뻐하는가?)
|
정장수 |
2009-11-29 |
9606 |
|
2008.11.09.주일오전예배(겟세마네 기도를 기억하는가?#3 마(マタイ福音書)26:36-46)
1
|
김현우집사 |
2008-11-09 |
9612 |
본문 : 마태복음 26장 36-46절
제목 : 겟세마네 기도를 기억하는가? (3)
==========================
36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37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쌔 고민하고 슬퍼하사 38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39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40 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 동안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41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42 다시 두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 43 다시 오사 보신즉 저희가 자니 이는 저희 눈이 피곤함일러라 44 또 저희를 두시고 나아가 세번째 동일한 말씀으로 기도하신 후 45 이에 제자들에게 오사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보라 때가 가까웠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우느니라 46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아멘
==========================
믿음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하나의 영적인 각성과 믿음의 삶에 대한 온전한 도전을 이룰 수 있는 하나의 지표를 찾으라 한다면, 예수님께서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시던 그 모습을 우리에게 영원히 기억되어야 할 지표로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을 구하여서 자신의 인생과 생명을 포기하고 아버지의 뜻대로 부름 받는, 그 부름의 현장 앞에 있었던 것이 바로 주님의 겟세마네 기도였기 때문입니다. 내 모든 것에서 아버지의 뜻이 내 안에 수렴되고 이루어지는 삶을 사는 것이 가장 복되다라고 결정하는 우리 인생에서 꼭 기억되어야 할 사건이 바로 겟세마네 기도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난 2주 동안 이 겟세마네 기도에 대한 말씀을 상고해 보았습니다. 오늘은 43~44절의 말씀 속에서 주님께서 겟세마네 기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를 들어보기를 원합니다.
1. 영적 이끎이 있었습니다. (43절 상: 다시 오사 보신즉)
예수님이 기도하고 와서 보시니 제자들은 자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지금 고민하고 죽게 되었는데 나와 한 시 동안도 깨어 있을 수 없겠느냐며 제자들을 꾸짖으시고 기도하신 후에 다시 와서 그들을 보고 계신 모습이 43절 상의 장면입니다. 주님의 삶의 완성은 주님과 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을 만들어 내는 것이었기 때문에, 제자들을 향한 주님의 관심과 정성은 지대했습니다. 비록 제자들이 지금 당신을 따라오지 못하는 연약한 모습에 있었지만, 그래도 주님은 그들을 살피면서 그들을 이끌려고 애쓰셨습니다. 제자들이 깨어서 기도한다는 것은, 주님을 위한 기도라는 사실을 뛰어넘어 그들의 영적인 회복과 능력을 받는 삶의 모습인 것을 아셨기 때문에, 주님의 그 죽게된 상황 속에서도, 정말로 간절히 기도해야 하는 그 상황 속에서도 제자들을 다시 와서 보신 것입니다. 그들이 주님의 영적인 이끄심을 받지 못하는 육체의 연약한 상황에 있었을 때에도 주님의 관심은 지속되었습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영적인 모습을 한 번 생각해보면, 우리가 연약할 때나 충만할 때나, 우리가 내 일을 감당할 때나 감당치 못할 때나 늘 안타깝게 바라보시고, 당신의 일보다 더 지대하게 관심을 가지고 계신 상대가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내 정신, 마음, 육체, 그리고 영적인 상태조차도 컨트롤 하지 못하는 상황에 있을 때에도, 그렇게 넉다운 되어있는 상황 속에서도 주님은 찾아와 보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권면하고 우리가 그 자리에서 일어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늘 기억해야 할 것은, 내가 지금 나의 믿음의 상태에 이른 것이 내 열심 때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 능력으로 지금 여기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가 입술로 함께 고백해야 할 것입니다. 나로 하여금 여기 있게 한 것은 주님의 이끄심이었습니다. 내가 원하던 원치 않던, 내가 알던 모르던, 내가 느끼던 느끼지 못하던, 어떠한 순간에서든지 주님은 항상 나를 이끌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내가 깊은 잠 속에 누워 있을 때에도 주님은 나를 살피셨고, 내가 영적인 깊은 침체기에 있었을 때에도 주님은 나를 떠나지 아니하시고 내 곁에 계셨습니다. 다시 한번 일어나기를 간절히 원하시며, 주님은 잠들어 있는 내 모습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계셨던 것입니다. 바로 그 지대한 관심이 있었기에 지금 나의 신앙의 삶이 존재하는 것이고 오늘 내가 주 앞에 서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를 보십시오. 주님이 ‘너희가 다 나를 다 버리리라’라고 하셨을 때에 “다 주를 버릴찌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라고 장담했던 사람이 베드로였습니다 (마 26장 31~33절). 자기 열심이 충만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자기 열심으로 자신을 세울 수가 있었습니까? 베드로 또한 다른 사람과 똑같이 잠들어 있었습니다. 우리는 내 열심이 나를 세울 것으로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지금 내가 이 상태로 이 곳에 서 있는 것은, 내 열심이 아닌 주님의 나를 향한 그 지대한 관심과 영적인 이끄심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임을 고백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오셔서 제자들을 바라보시는 그 모습이 바로 지금 나를 바라보시는 주님의 모습인 것을, 우리는 겟세마네의 주님에게서 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2. 무엇을 보아야 할지를 말합니다. (43절 하: 저희 눈이 피곤함일러라)
피곤함으로 따지자면 누가 더 피곤했을까요? 주님은 피곤하지 않으셨을까요? 주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셨으므로 피곤을 모르셨던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 분은 철저하게 육체를 가지신 분입니다. 철저하게 말씀이 육신이 되어서 오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육신의 한계도 우리와 똑같이 느끼셨고, 우리와 똑 같은 고통, 피곤, 욕구들로 당신의 몸이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단순히 주님을 따라다니기만 하면 되었던 제자들과 달리, 그들을 이끌고 살피고 가르치고 수고해야 했던 주님이 제자들보다 더 빨리 피곤을 느끼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다 자고 있는데 주님은 지금 깨어 계신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것도 눈꺼풀이지만, 가장 가벼운 것도 눈꺼풀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눈이 무엇을 보느냐에 따라서 이 세상의 일들이 달라진다는 말입니다. 내가 무엇을 보느냐에 따라서 내 눈이 뜨이기도 하고 감기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피곤해서가 아닙니다. 만약 피곤 때문이었다고 한다면 주님께서도 함께 눈을 감으셔야 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왜 저희의 몸이 피곤하다 하지 않으시고 눈이 피곤하다고 하셨습니까? 그것은 주님과 제자들의 관점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눈은 하늘을 향해 열려 있었습니다. 육체는 제자들보다 더 피곤했지만, 당신의 눈 만큼은 아버지를 향해 열려 있었기에 제자들보다 더 피곤을 느끼셨지만 당신의 눈은 열려져 있었고 깨어 있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무리 피곤해도 내가 하늘을 바라보고 아버지를 바랄 때에 내 눈은 뜨이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의 눈에서 소망의 빛이 보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눈이 하늘을 향해 열려있으면, 우리의 육체의 피곤함이 문제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왜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우리의 눈이 왜 계속 감깁니까? 우리의 눈이 이 땅의 것으로 충만해 있기 때문입니다. 자꾸 땅을 보고 걷는 것입니다. 하늘을 보고, 아버지를 바라보아야만 합니다. 제자들이 땅을 바라보고 있을 때에 그들은 졸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하늘과 아버지를 바라보셨고, 그 때 그의 눈이 열려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내 영적인 상태와 내가 무엇을 보느냐 하는 것은 우리가 늘 신중하게 고려해야 할 부분입니다. 내 눈빛이 지금 아버지를 바라보는 눈으로 반짝이고 있는지 점검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겟세마네 기도를 통해, 우리가 무엇을 바라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 분명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3. 자신이 감당해야 할 일이 있는 것입니다. (44절 상: 또 저희를 두시고 나아가)
주님은 두 번째 오셨을 때 제자들이 자고 있는 모습을 보시고, 그들을 그대로 두신 채로 자신의 기도의 자리로 돌아가셨습니다. 이것은, 자기 자신이 감당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삶에서는, 두 번째로 제자들이 자는 모습을 보았을 때 포기하고 같이 자버리는 것과 같은 일들이 다반사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여러분, 기억하셔야 합니다. 자신의 일을 감당하는 것은 상대적인 것이 아닙니다. 사명은 절대적인 것입니다. 상대에 의해 움직여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그 사명 자체로 움직여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역에 있어서 물론 동역이 필요하지만, 동역이 주어지지 않았다 해서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네가 하지 않으면 나도 하지 않겠다라는 것은 아직 사명으로 바로서지 못한 모습입니다. 네가 못하더라도 나는 내가 해야 할 일을 하겠다는 것이 사명으로 사는 것입니다. ‘당신이 가지 못하면 나도 가지 못하겠고, 당신이 못하면 나도 못하겠습니다’라고 주저앉는 것은 사명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운명으로 사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운명에 사로잡혀서 살아갑니다. 환경 탓을 하면서 나는 못한다고 말하고, 자신의 운명대로 살아가려고 합니다. 조력과 동역이 없다 해서 내 삶을 포기하고 내 사역을 포기하고 내려 놓습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절대적으로 사명으로 살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다 누워 잔다 할지라도, 나를 위하여 기도하는 사람이 단 한 생명도 없다 할지라도 내게 주어진 그 사명의 길을 위하여 다시 기도의 자리로 올라가는 것. 나도 거기에 눌러앉아 자고 싶지만, 그래도 여기는 내 자리가 아니라면서 다시 내 기도의 자리로 올라가는 것. 주님은 당신의 삶을 운명으로 사셨던 것이 아니라 사명으로 사셨습니다. 주님을 닮고자 하는 우리가 왜 이 세상의 살아가는 모습을 닮아가려고 합니까? 왜 믿음의 사람들이 환경, 부모, 자식, 배우자를 탓하는 그러한 상대적인 개념으로 살아가는 모습으로, 운명으로 살아가는 그 삶의 모습으로 살아가려 하느냐는 것입니다. 누가 뭐래도 나는 내 길을 가야 하는 것입니다. 누가 뭐래도 내게 주어진 사역은 내가 감당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명으로 인생을 사는, 주님 앞에 아름답게 칭찬받을 사람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피곤하신 가운데, 당신의 사명을 위하여 다시 기도의 자리로 올라가시는 주님의 모습을 기억합시다. 우리가 아무리 피곤하고 힘들고, 내 인생 가운데 아무리 많은 환경이 나를 얽매려 한다 할지라도 거기에 매이면 안됩니다. 나를 유혹하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 내 본연의 그 자리로 다시 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명으로 살아가는, 저희를 두고 나아가시는 주님의 그 모습 속에서 발견케 되는 모습입니다.
4. 세 번은 기도해야 합니다. (44절 하: 세번째 동일한 말씀으로 기도하신 후)
주님은 왜 같은 기도를 세 번 하셨을까요? 주님은 아버지의 뜻이 자신 안에 수렴되기까지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기도를 한 번 하고 끝냅니다. 그 기도가 내 뜻을 이루기 위함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처음 가지는 생각과 마음은 자신의 욕구에 의해서 강하게 나타나는 현상들입니다. 그래서 처음 기도하는 모습은 다 하나님 앞에 내 뜻을 구하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뜻이 아닙니다. 내 뜻이 이루어지기를 구하는 것이 처음 기도의 모습인 것입니다. 주님께서 세 번을 기도하신 것에는, 내 뜻이 이러할진데 그래도 내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내 뜻이 아닌 아버지의 뜻이 되어야 한다는, 그 응답이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하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있으면 좋겠지만 세 번 기도하고 나니까 그 잔은 자신이 마셔야 할 잔이라는 것을 깨닫고서 아버지의 뜻이 내 안에 온전히 수렴되어지는 그 모습이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내 뜻이 아닌 아버지의 뜻이 내 안에 이루어지기까지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 살기로 결단하고 작정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늘의 소망, 그 가치를 가지고 살기로 작정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내 안에 내 뜻이 이루어지기 이전에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더 기뻐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만약 아버지의 영광이 아닌 내 영광이 내 안에 이루어지기 위해서 사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한 번만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왜입니까? 영광 자체가 나이고, 나 자신을 위하여 사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나 자신을 위해 살기를 포기한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안에서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원하고, 그래서 그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내 인생에 있어서 최대의 행복이요 기쁨이라고 작정한 사람들입니다. 만약 아직도 내 소원만을 한번 아뢰고 기도를 마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주인이 자기 자신이라는 뜻이고, 자기 자신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내 바램과 소원이 있지만, 내 소원보다는 아버지의 소원이 내 안에 이루어졌을 때에 그것이 나에게 있어서 가장 유익한 일이라는 것을 우리는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자신의 뜻을 아버지의 뜻 아래 내려놓기 위해 세 번을 반복해서 기도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몸에 있는 가시를 제거하기 위해서 세 번을 기도했다고 고린도후서 12장 7절 이하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고후 12:7~10: 7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8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9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함이라 10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이 말씀을 유심히 살펴보면, 바울이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이라고 말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바울은 자신의 가시를 사단이 가져다 준, 아버지의 일을 이루는데 있어서 가장 방해가 되는 요소라고 믿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 안의 육체적인 결함, 한계, 고통이, 아버지의 사역을 감당하지 못하도록 사단이 내 안에 연약함으로 가져다 준 ‘사단의 사자’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없으면 내가 더 많은 일을 감당할 수 있겠다고 스스로 생각하면서 자신 안의 ‘사단의 사자’를 제거하여 달라고 세 번을 기도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기도하니, 9절 내용에서와 같이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뜻이 내 안에 수렴되니까, 그 가시가 사단이 준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를 위하여 주신 연약함이었다는 것입니다. 기도하기 전에는 사단이 나를 저주해서 아버지의 일을 감당치 못하게 하려고 나를 연약한 모습에 묶어놓는 사단의 사자로 바라보았던 것이, 세 번 기도했더니 자신의 뜻이 다 바뀌어서 아버지의 뜻이 그 안에 발견되었던 것입니다. 그 가시가 오히려 아버지의 축복이었다며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모든 능력과 기사를 행했고, 신양 성경 대부분을 쓴, 위대한 능력을 가진 사도 바울입니다. 그런데 많은 성도들 앞에 자신의 육신의 연약함을 안고 있는 모습이 덕이 되었겠습니까? 어떻게 봐도 자신에게 합당한 것이 아니라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아버지께 기도했더니 자신의 육신의 연약함이, 사도로서 자신의 병마를 쫓아내지 못하는 부족한 모습이 아닌, 오히려 그것이 나를 하나님 앞에 바로 서게 하고 내가 주의 뜻을 온전히 이룰 수 있게 하는 아름다운 하나님의 축복이었다는 것을 새롭게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안에 소원이 있다면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과 사도 바울은 세 번 기도해서 아버지의 뜻을 수렴했지만 우리는 죽을 때까지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부르실 때까지 내 것을 내려놓기 위해서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 시라도 기도를 쉬지 못할 것입니다. 범사에 아버지의 뜻이 내 안에 이루어지기까지 우리는 내 것과 내 생각을 내려놓는, 그래서 아버지의 뜻만이 내 안에 수렴되는, 그래서 내게 나타나는 모든 것이 다 아버지의 뜻이라고 고백하는 그 모습을 위해서 순간순간 무릎 꿇어야 하는 것입니다. 세 번이 아니라 30번씩 세 번이라도, 300번씩 30번이라도 우리는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겟세마네 기도에서 똑 같은 기도를 세 번 하심으로 말미암아, 어떤 모습으로 아버지의 뜻이 우리 안에 이루어져야 하는가에 대하여 우리에게 분명히 조명해 주셨습니다.
녹취: 오지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