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2 |
2019. 06. 16 주일오전예배 설교 (요3:16-21 인간의 사랑) 18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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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실이 |
2019-09-27 |
1998 |
301 |
2019. 05. 26 주일오전예배 설교 (요3:1-15 영생을 얻으려면) 16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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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실이 |
2019-09-27 |
1995 |
300 |
2021. 05. 09 주일오전예배 설교 (요12:20-26 아버지께서 귀히 여기는 자)110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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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실이 |
2021-05-22 |
1995 |
299 |
2019. 09. 29 주일오전예배 설교 (요4:43-45 예수님의 고향생각) 32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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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실이 |
2019-11-25 |
1992 |
298 |
2019. 10. 13 주일오후예배 설교(히7:26-28 히브리서강해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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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실이 |
2019-11-25 |
1991 |
297 |
2019. 10. 20 주일후예배 설교:임진형 목사 (롭1:14-17 주님께 빚진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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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실이 |
2019-11-25 |
1990 |
296 |
2018. 02. 04 주일오후예배 (벧1:5~7 베드로후서 강해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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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실이 |
2018-02-05 |
1987 |
295 |
2020. 03. 29 주일오전예배 설교:김장호선교사 (고전15:12-17 부활의 주님을 믿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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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실이 |
2020-04-11 |
1986 |
294 |
2021. 05. 16 주일오전예배 설교 (요12:20-26 마음이 괴로울때에 ) 111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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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실이 |
2021-05-22 |
1986 |
293 |
2020. 11. 08 주일오전예배 설교 (요9:4-5 빛의 능력에 대한 반응 ) 84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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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실이 |
2020-11-15 |
1983 |
292 |
2019. 09. 29 주일오후예배 설교 (히7:4-10 히브리서 강해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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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실이 |
2019-11-25 |
1980 |
291 |
2019. 11. 24 주일오후예배 설교 (히8:1-13히브리서 강해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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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실이 |
2019-12-10 |
1979 |
290 |
2020. 09. 27 주일오전예배 설교 (요8:38-44 대적의 실체 다른 아버지 ) 78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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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실이 |
2020-10-14 |
1975 |
289 |
2019. 06. 23 주일오전예배 설교 (요3:22-30 주가 흥가기 원하는사람) 19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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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실이 |
2019-09-27 |
1974 |
288 |
2019. 02. 10 주일오전예배 설교 (요1:9-13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3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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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실이 |
2019-08-15 |
1973 |
287 |
2021. 08. 29 주일오전예배 설교 (요14:1-3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126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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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실이 |
2021-09-17 |
1970 |
286 |
2020. 06. 14 주일오전예배 설교 (요7:37-44 예수께서 서서 외친 것 ) 63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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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실이 |
2020-07-13 |
1967 |
285 |
2018. 02. 04 주일오전예배 (마26:57~68 예수 그리스도의 침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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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실이 |
2018-02-05 |
1966 |
284 |
2020. 09. 06 주일오후예배 설교 (히12:9-13 히브리서 강해 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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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실이 |
2020-10-05 |
196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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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04. 25 주일오전예배 설교 (요12:20-26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하여) 108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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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실이 |
2021-04-30 |
1949 |
본문 : 마태복음 26장 47-56절
제목 : 성경이 이루어지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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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말씀하실 때에 열 둘 중에 하나인 유다가 왔는데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큰 무리가 검과 몽치를 가지고 그와 함께 하였더라 48 예수를 파는 자가 그들에게 군호를 짜 가로되 내가 입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으라 하였는지라 49 곧 예수께 나아와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 하고 입을 맞추니 50 예수께서 가라사대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 하신대 이에 저희가 나아와 예수께 손을 대어 잡는지라 51 예수와 함께 있던 자 중에 하나가 손을 펴 검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 52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 53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 두 영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54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리요 하시더라 55 그 때에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를 잡으러 나왔느냐 내가 날마다 성전에 앉아 가르쳤으되 너희가 나를 잡지 아니하였도다 56 그러나 이렇게 된 것은 다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시더라 이에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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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마태복음 26:47-56절의 말씀을 가지고 성경이 이루어지는 삶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합니다.
여러분, “돌싱”이라는 신조어를 아십니까? “돌싱”은 “돌아온 싱글”이라는 뜻이지요. 재혼을 희망하는 돌싱들은 배우자의 조건 중에서 어떤 부분을 중요하게 생각하는지를 다룬 한 신문 기사를 보았습니다. 결혼과 이혼의 경험이 있는 그녀들이기에 가장 정확한 시각을 가질 수 있다라는 기사와 함께 그들이 어떠한 배우자를 다시 찾고 있는가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는데, 돌싱들이 말하는 신랑의 조건에는 경제능력, 집안의 학벌, 혈액형, 출신 지역 등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여러분, 그렇다고 한다면, 돌싱이 많아진 지금 그들이 말하고 있는 조건의 사람이 결코 없다는 것인가… 가만히 따져보면, 그들이 원하는 조건들은 그 어느 때보다 지금 현대 시대에 가장 잘 갖추어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결코 조건의 문제가 아니라고 결론이 내려지는 것입니다. 옛날은 지금과 비교했을 때 더 열악했던 조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시대에 돌싱들이 더 많다는 것은 무엇을 반영하고 있습니까? 세상의 풍조입니다. 세상의 풍조가 그렇게 바뀐 것입니다. 사회적으로 이혼이 받아들여지지 않던 옛날과 비교할 때 지금은 오히려 돌싱이 환영 받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혼했다 해서 문제 삼는 사람이 없습니다. 오히려, 더 좋은 기회가 주어졌다고 믿고 있을 뿐입니다. 더 이상 허물이 되지 않는 이 시대의 풍조와 유행인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 풍조를 통해서는 우리가 더 좋은 조건을 받아들이고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이 세상의 풍조와 유행에 따라 사는 사람을 멋쟁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여러분, 세상의 풍조를 따라가 보십시오. 삶 가운데 남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히려 망가진 나 자신의 모습 밖에는 그 안에 발견되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풍조를 따라가는 것이 우리의 삶을 얼마나 위험하게 만들고 있습니까. 그래서 성경에서 주님은 넓은 길로 가지 말 것을 우리에게 부탁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7:13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여러분, 우리의 삶의 기준은, 특별히 믿음의 사람들의 삶의 기준은, 세상의 풍조가 아닙니다. 세상이 아무리 그러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다 할지라도 우리의 삶이 이 세상의 풍조에 맞추어져서 “남들이 하니까 나도 한다”라며 묻혀 살아가는 것이 신앙인의 모습이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풍조가 어떻게 바뀌던 간에, 신앙인에게는 하나님의 말씀과 성경이 기준 되어서 아버지의 말씀이 내 안에 이루어지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가장 아름답고 귀한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언제나 당신의 삶 가운데 아버지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에 대해서 오늘 본문을 통해 더 확실히 제시해주고 계십니다. 당신의 삶을 통해 성경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아주 노골적으로 말씀하시면서 그 이루어지는 과정을 그대로 밟아가는 그 모습입니다. 주님과 같이 우리도 성경이 내 안에 이루어지는 삶을 걸어가는 것이야말로 주님의 제자요, 신앙인의 가장 기본적인 삶의 모습입니다. 세상의 풍조는 우리 삶의 육신의 모습을 편의로 제공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참된 길이 아닙니다. 성경이 이루어지는 삶의 원리와 성경의 삶이 이루어지는 주님의 모습이 어떠했는가를 보여주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 안에도 성경이 이루어지는 삶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1. 성경이 이루어지는 삶은 감정으로 사는 삶이 아닙니다 (51절: 예수와 함께 있던 자 중에 하나가 손을 펴 검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
우리 안에 순간적으로 일어나는 불안한 감정들이 있습니다. 전혀 의식하지 않고 있던 것들이 어떠한 특정한 계기로 말미암아 내 안에 불쑥 일어나는 돌발적인 상황이 우리 안에 일어나는데, 그것은 우리가 얼마나 감정에 치우쳐서 살아가고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래서 감정이라는 것은 삶 가운데 받았던 아픔이나 상처가 깊숙이 쌓여있다가 그것이 건드려지는 때에 나도 모르게 분으로 폭발해 나오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감정적인 사람을 경계해야 하고 우리 안에 있는 감정을 다스려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순간적인 감정에 베드로가 칼을 빼서 내려쳐 귀를 잘랐습니다. 주님께서 그 귀를 주워 붙이시면서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라면서 그의 감정을 자제시키고 억제하는 것을 바라보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가 주님의 일을 한다 하면서 우리의 감정을 앞세우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또 그것 때문에 주님의 일이 온전하게 이루어지는 것이 얼마나 방해되고 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감정을 죽이기보다는 오히려 그 일을 그르친다 하더라도 내 감정을 달래고 위안을 삼을 수 있는 일에 더 빨라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 감정적인 사람들은 감정이 폭발해도 문제지만, 감정이 식어도 큰 문제로 남는 것을 바라보게 됩니다. 56절을 보십시오. 그들의 감정이 다 가라앉자 나타나는 행동은 무엇이었습니까?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감정이 폭발했을 때에는 무엇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그 감정이 사그라지자 자신의 현실의 두려움 앞에 다 예수를 두고 도망가버렸다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감정이라고 하는 것은, 그리고 감정의 삶을 산다는 것은 주님의 일을 이루는 데에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것 때문에 아픔과 상처를 주는 일들이 얼마나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습니까.
에베소서 4:26에서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라고 말합니다. 디모데전서 2:8에서는 “그러므로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라고 나와있습니다. 우리의 감정과 분이 일어나려 할 때에 우리는 두 손을 들고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합니다. 감정을 통해서 성경을 이루는 삶을 살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당신의 삶의 모든 것으로 성경이 이루어지는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은 당신의 감정의 컨트롤에 능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감정을 다스리기 바랍니다.
2. 성경이 이루어지는 삶은 힘으로 이루는 삶이 아닙니다 (52절: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
이 땅의 많은 사람들이 힘을 가지기를 원합니다. 여기서 문제는, 그 힘을 왜 가져야 하는지, 힘을 가진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함으로 그 힘이 남용되거나 잘못 쓰여지고, 그 힘으로 인해서 부작용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힘을 가지기를 원하는 자들이 먼저 알아야 할 자신의 부분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왜 사람들이 힘을 가지기를 원합니까? 그것은, 나 자신에게 그만한 힘이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부분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못합니다. 이것을 잊고, 그 힘이 주어졌을 때에 힘을 잘못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을 아는 자들은, 자기 안에 자신의 무능함이 보일 때에 거기에서 새롭게 세워진 힘을 가지고 아름답게 사용하게 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대해 무지하고, 그저 자기에게 주어진 힘으로 무엇인가를 이루려고 합니다. 그 곳에서 모든 것이 잘못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땅에 칼로 피를 뿌림으로 세상을 정복했던 많은 역사를 보십시오. 아직도 건재하고 있는 제국이 있습니까? 다 역사 속에 잠자고 있습니다. 그 힘의 원천이 오직 자신의 제국을 건설하는 자신의 영광만을 위해 쓰여졌을 때에 오래가지 못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이 인류의 구속을 위해서 당신의 사랑을 피로써 흘렸을 때에 온 세계가 다 그 분의 사랑 안에 들어오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과 희생이었습니다. 성경으로 사는 삶은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희생과 섬김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베드로는 그 칼을 빼어서 세상 사람들이 이루려고 하는 방법과 같은 모습으로 그 일을 진압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가능하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네가 그것으로 서면 그것으로 망할 것이라고 경고하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세상에서 우리의 힘으로 주님의 일을 이루는 것이 결코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강력을 통해서 일을 이루시는 것이 아니라 연약함을 통하여서 오히려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권능으로 이 땅의 모든 일을 이루어 가십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원리가 우리 삶에 그대로 적용될 때에 우리는 아주 아름다운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당신 안에 성경이 이루어지는 삶을 고집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성경이 우리의 삶에 이루어지는 것을 고집하기 보다는 내 안에 있는 정말 미약한 그 힘을 붙잡고 의지해서 그것으로 세상을 살려고 얼마나 발버둥 치고 있습니까? 우리의 에너지가 아주 잘못된 곳에 쓰이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에너지가 하나님의 성경이 이루어지는 삶을 온전히 신경쓰기를 원합니다. 작게나마 있는 내 힘과 능력으로 무엇인가 이루려 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아버지의 말씀이 내 안에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그 간절한 사모함으로 서 있어야 합니다. 주님과도 같이 말입니다. 주님은 비록 당신은 죽음의 길로 가는 것이었지만 그것이 아버지의 뜻인 성경을 이루는 삶의 원리였던 것을 아시고 묵묵히 그 길을 가셨던 것입니다.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것이 자신의 삶의 최대의 축복인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3. 성경이 이루어지는 삶은 자신의 소원을 이루는 삶이 아닙니다 (53절: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 두 영 더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주님은 이 모든 것을 한 마디 기도를 통해서 이루실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 방법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감정에 치우쳐 있던 제자들을 달래기 시작하셨습니다. 내가 능이 없고 할 수 없어서가 아니라, 당신 안에 이루어지는 성경의 삶의 원리가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보일 수 있는 삶의 중심이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자아중심적인 우리는 항상 자신의 입장에서 모든 것을 판단하려 하고, 보려 하고, 일을 마무리 하려고 합니다. 타인의 일은 뒤로 하고 자신의 입장에서 모든 것을 생각하고 판단하고 마무리 지으려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아중심적인 우리 삶의 모습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운동 중 하나는 골프입니다. 골프는 남을 제치고 이기는 모습에 박수 쳐주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까지 기다려주고 오히려 나보다 뒤쳐진 자를 먼저 가게 하는, 그 사람이 먼저 가는 그 모습을 바라보고 나는 내 자리에서 내 길을 가는 운동이기 때문입니다. 상대방이 자신의 일을 다 마칠 때까지 시간이 얼마가 지나든 뒤에서 묵묵히 아무 말 하지 않고 기다려주는 것입니다. 옆 사람을 충분히 배려한다는 점에서 이 운동만큼 신사적인 것은 또 없습니다. 자신의 욕구에 앞서 옆 사람의 입장에 서 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좋습니까.
여러분, 지금 주님은 자신이 당면한 일을 해결할 수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당신의 마음 같으면 당장이라도 천국의 천군천사를 불러서 일을 해결할 수 있었지만, 당신의 소원을 이루는 것에 목숨 걸지 않았던 이유는 내 안에서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더 원하는 모습이 간절했던 것입니다. 내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 소원에 앞서 아버지의 소원이 더 중시 되었던 것입니다. 바로 당신을 보낸 일을 이루는 것이 내 사적인 소원을 이루는 것보다 더 앞서 달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안에 이루어지는 것이 오직 하나님께서 내 안에 주신 성경을 이루는 삶의 원리로 달려갈 때에, 내 소원보다 주님의 소원이 우선될 때에, 우리 안에 있는 소박한 소원이라 할지라도 다 이루어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모습의 삶을 항상 가지고 있어야 하겠습니다.
4. 성경이 이루어지는 삶은 아버지의 뜻을 아는 삶입니다. (54절: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리요)
우리의 삶의 혼돈은 나를 향한 아버지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옵니다. 주님은 아버지의 뜻을 어떻게 이해하고 계셨고 어떻게 아실 수가 있었습니까? 그것은 성경을 밝히 아는데 있었습니다. 성경에, 아버지의 뜻은 “이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능히 알았던 것입니다. 곧, 성경을 이루는 삶 자체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도 아버지의 뜻을 충분히 알고 있습니다. 단지,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삶의 원리보다 내 소원이 앞서 달리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과 아버지의 뜻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기쁘게 순종하지 못하는 데에 이유가 있는 것이지, 아버지의 뜻을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삶의 중심 가운데 아주 잘못된 것은 “내가 잘 몰랐다”라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몰랐다고 얘기하면 그 부분에 있어서 면죄부가 주어지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착각하는 것입니다. 모름으로 말미암아서 그 상황이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죄를 몰랐다 하면 죄가 없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죄를 몰랐어도 내 안에 죄가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모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얼만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밝히 알고, 그 아는 부분만큼 내가 순종의 삶을 사느냐가 더 중요한 것입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뜻을 알고 아버지의 뜻대로 살아가는 삶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래서 호세아 4:6에서는 내 백성이 지식이 없어 망한다고 말합니다 (호세아 4:6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라). 알지 못해서 망하는 것입니다. 모르는 것이 자랑이 아니라, 또한 모르는 것이 부끄러운 모습으로 남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얼마나 성경에 대해 밝히 알려고 노력했는가, 아버지의 뜻이 내 안에 이루어지기를 원하여서 얼마나 사모함으로 성경을 바라보고 있는가 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능히 아버지의 뜻을 아는 삶을 사실 수 있었던 것은 성경을 밝히 아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이미 성경으로 당신의 뜻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애써 그 모습에 대하여 눈을 돌리려고 하고 있습니다. 내 욕심이 먼저 달려가는 그 모습 때문에. 그 말씀 가운데 순종하고 따라가기 원하는 마음의 결여를 통하여서 하나님의 뜻이 내 안에 이루어지기보다 내 얄팍한 생각 가운데 있는 삶의 원리가 먼저 이루어지기를 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성경을 통하여 아버지의 뜻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 삶을 사셨습니다. 아는 만큼 그 진리 가운데 서서 그대로 순종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신앙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아버지의 뜻을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뜻은 우리에게 보여주신 만큼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성경을 통해서 당신의 뜻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하지만 아멘으로 결단하면서 그 말씀에 순종하려고 하는 의지가 부족한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아직 그곳에 다다르지 못한 것뿐입니다. 바랍니다, 여러분. 주님이 아버지의 뜻을 아는 삶을 살고 순종으로 그 일을 이루셨듯이, 아버지의 말씀인 성경을 통하여서 하나님께서 내게 뜻하신 것을 밝히 알고 그 부분에 묵묵히 아멘으로 순종하며 달려가는 저와 여러분의 신앙의 삶이야말로 성경이 내 안에 이루어지는 것을 고수하셨던 주님의 삶의 원리가 그대로 적용되는 삶인 줄로 믿습니다.
녹취:오지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