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0 |
2009.4.19주일 설교말씀 (마(マタイ福音書)28:11-15/현대인의 유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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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장수 |
2009-04-19 |
906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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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9 |
2008.10.1.수요예배(요한복음講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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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우집사 |
2008-10-01 |
906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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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8 |
2013. 5 . 25 주일오전예배 김용수목사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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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재석전도사 |
2013-05-27 |
906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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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7 |
2009.4.1 수요예배 설교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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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장수 |
2009-04-01 |
905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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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6 |
2013. 03.03 주일오후예배 김용수목사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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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재석전도사 |
2013-03-04 |
90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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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5 |
2013. 5 . 19 주일오전예배 임진형목사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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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재석전도사 |
2013-05-27 |
90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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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4 |
2013년 3월24일 주일낮예배 김용수목사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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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재석전도사 |
2013-03-25 |
90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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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3 |
2008.12.03 수요예배 설교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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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우집사 |
2008-12-04 |
90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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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12. 28 주일낮예배 설교말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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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웅 |
2008-12-28 |
9043 |
이번에는 음성만 녹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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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1 |
2013년 4월 28일 주일오후예배 김용수목사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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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재석전도사 |
2013-04-29 |
90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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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0 |
2009.5.3 주일 찬양예배 설교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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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우집사 |
2009-05-03 |
90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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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9 |
2008.10.26.주일오전예배(겟세마네 기도를 기억하는가? 마26:36-48)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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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우집사 |
2008-10-26 |
90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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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8 |
2008.12.25 성탄절 설교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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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우집사 |
2008-12-25 |
90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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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7 |
2009.4.5 주일 찬양예배 설교말씀 (잠언箴言 22:28-29/솔로몬의 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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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장수 |
2009-04-05 |
90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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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6 |
2009.1.28 수요예배 설교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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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우집사 |
2009-01-29 |
90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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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5 |
2009.2.22 주일 설교말씀 (마マタイ福音書27:45-56/오직 한 길 예수)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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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장수 |
2009-02-22 |
90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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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4 |
2013. 5 . 5 주일오후예배 김용수목사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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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재석전도사 |
2013-05-07 |
899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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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3 |
2013. 2. 3 오후예배 설교:김용수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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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재석전도사 |
2013-02-04 |
899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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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2 |
2013년 1월13일 오후예배 롬1:1~7 설교:김용수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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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재석전도사 |
2013-01-20 |
899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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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1 |
2014. 1. 12 주일오전예배 동경연합장로교회 김용수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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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재석전도사 |
2014-01-13 |
899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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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주간 동안 평안하셨습니까?
올 한 해 어떻게 사셨습니까? 옆 사람과 인사합니다. 묻지 말라고 하고 싶을 만큼 어렵고 힘든 분도 계시겠지만, 저는 올 한 해가 너무나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신 모든 일에 대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싶습니다. 모든 것이 다 감사하지만 예년과 마찬가지로, 그러나 특히 더 실감나게 느껴진 것이 있다면 그것은 ‘시간이 참 빠르다’라는 것입니다. 2008년은 제 인생에서 가장 빠르게 지나간 한 해였습니다. 2008년을 제외하고 두 번째로 빠르게 지나간 해는 2007년이었으며, 세 번째로 빠르게 지나간 해는 2006년이었습니다. 예상컨대 2009년은 아마도 2008년보다도 더 빠르게 지나가지 않을까 싶습니다. 참으로 한 해가 지나감에 따라 인생의 속도는 1마일씩 가속된다고 하는 세상 말이 너무나도 실감나게 다가옵니다. 30세의 인생 속도는 30마일, 40세의 인생 속도는 40마일이 되는 것 같습니다. 세월의 빠름을 나타내는 옛 말에 ‘쏜살 같다’라는 표현이 있는데, 정말로 인생이라는 것은 마치 활대를 떠나 날아가는 화살처럼 그야말로 날아가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여러분들도 머지 않았습니다. 아직 젊다고, 시간이 느리다고 느긋하게 여유부릴 시간이 없습니다. 저는 이렇게 2008년을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이렇게 빨리 지나가 버리는 것이 인생이구나’ 하는 것을 새삼스럽게 확인하였습니다. 2008년 한 해를 마무리 짓고 결산해야 하는 시점에서, 어떤 사람들은 미리 2009년에 대한 계획을 세우고 그에 대한 희망과 꿈에 부풀기도 합니다. 그러나 저는 2008년의 끝을 며칠 앞으로 둔 이 시점에서, 이렇게 빠르게 지나가버리는 시간 속에서 우리들이 미처 깨닫지 못하고 간과해 왔던 가장 기본적인 일들을 짚어 보면서 2008년의 우리의 신앙을 깔끔하게 마무리 짓고 2009년이라는 새 술을 담을 새 부대를 준비하는 작업을 해보려고 합니다.
오늘의 본문에는 두 사람의 등장인물이 있습니다. 한 사람은 베드로이고 다른 한 사람은 유다로, 이들 두 사람은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아는 대표적인 예수님의 두 제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삶의 모습에서 그들이 주님을 온전히 쫒고 주님이 주신 사명을 잘 감당하였는지에 대하여 살펴보자면, 지금 본문 속에서는 전혀 그렇지 못한 그들의 모습이 나옵니다. 베드로는 너도 그와 함께 있었던 자가 아니냐 라는 추궁의 말에 저주와 함께 자신은 주님을 모른다고 강하게 부인하였고, 한편 유다는 예수님이 고통 받는 모습을 보고 마음의 가책을 느껴 예수를 판 대가인 은 30을 대제사장에게 되돌려주며 없었던 일로 하자고 했고 이에 대해 너의 죄 값은 네가 감당하라는 대답에 후회의 마음을 이기지 못해 목을 매어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두 사람 모두 이 시점에서는 실패한 자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3년 반 동안 동고동락하며 직접 가르치고 이끌었던 제자조차도 이렇듯 삶 속에서 실패와 오류를 범하는데, 하물며 우리는 어떻겠습니까? 2008년의 우리의 신앙의 삶을 가만히 돌아보면 우리 역시 너무나도 후회할 일이 많고 실패하였으며 잘못한 일이 많았습니다. 진정 문제가 되는 것은 실패했다는 사실 자체가 아닙니다. 문제는 우리 스스로도 실패의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자각의’ 실패가 너무나도 많다는 것입니다. 이 자리의 성도 여러분은 그럴 정도의 배짱을 가지신 분은 없으리라고 보입니다만 만약 우리가 올 한해에 대형 절도 혹은 세간의 비난을 받을 간음을 범했다거나 사람을 죽이는 살인의 죄를 지었다면 우리는 그러한 죄를 그대로 안고 살아 갈 수 없었을 것이며 즉시 잘못을 인정하고 주 앞에 엎드려 회개를 하였을 것입니다. 우리를 자각의 실패로 이끄는 우리의 죄악은 세상 속의 대형 범죄가 아니라 생활 속에서 잘못인지도 알지 못하면 반복하게 되는 바로서지 못함에 있는 경우에 많습니다. 즉 본문에서 베드로와 유다가 자신의 사명을 감당하지 못했던 이유는 다른 것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바로 그들 안에 내재되어 있었다는 점에 비추어 보면, 우리 역시 우리의 사명을 감당치 못한 이유도 다름 아닌 우리 자신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하게 바라보아야 하는 것은 두 사람이 지금은 같이 실패한 모습으로 보이지만 한 사람은 영원한 지옥불에 있고 다른 한 사람은 다시 일어나 하루에 무려 3000명 5000명 이상의 죄인을 회개케 하는 사역자로 변화되었다는 것입니다. 똑같이 실패하고 똑같이 좌절하여 낙망하였으며 똑같이 슬픔에 울면서 자신을 책망하는 과정을 겪었습니다. 그 차이의 원인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회개, 바로 철저한 회개였습니다. 회개가 그들의 인생을 다르게 만든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습니다. 개역성경은 유다가 ‘뉘우쳤다’는 단어로 표현이 되어 있으나, 일본어 성경 등 올바로 된 번역 표현은 ‘뉘우쳤다’가 아닌 ‘후회하다’입니다. 다시 말하면 후회하고 그것으로 그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저지른 잘못에 대하여 ‘그것이 잘못되었다 그렇게 하지 말았어야 할 것을’ 이라는 후회에 머물고 그쳤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경우는 반복하여 3번이나 의지적으로 예수님을 부인함으로써 어쩌면 유다보다도 더 파렴치한 잘못을 범하였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더욱이 베드로는 예수님의 제자 중에서도 수제자로서 유달리 예수님의 사랑을 받았던 제자였고, 이전에도 “모든 제자들이 다 예수님을 버려도 나는 그러하지 않습니다”라고 다른 제자들의 입장과 믿음을 무시하면서까지 자신의 순종심을 내세우며 예수님을 향한 마음에 강한 자신감을 보이던 그러한 제자였습니다. 그런데도 베드로가 유다와 다른 길을 걷게 한 원인은 무엇이겠습니까? 다시 한번 말씀드리건대, 그것은 회개였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과오에 대하여 철저한 회개를 함으로써 자신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지금 2008년을 마무리하고 새로운 2009년을 맞이해야 하는 중요한 시점에 서 있습니다. 2009년 새해를 더 아름답게 맞이하기 위해서는 지금 2008년 한 해를 되돌아 보면서 나에게 있었던 죄악을 하나하나 철저하게 반성함을 통하여 주님 앞에 온전히 용서받는 것이 절실히 요구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2009년은 필시 2008년보다도 더 빠르게 정신없이 지나갈 것이고, 그러한 2009년을 어떠한 모습으로 맞이하느냐에 따라 2009년이 우리의 신앙의 삶 속에서 어떠한 메시지를 가져다 줄 것인지가 결정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2008년의 한 해를 철저히 반성하고 돌아봄으로 인하여, 다가오는 2009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고 바라는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여러분과 제가 되기를 바랍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크고 굵직한 죄에 대한 반성과 회개는 비교적 쉽게 깨닫고 주님 앞에 엎드림으로써 이미 죄사함 받았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빠져 쉽게 벗어나기 힘든 죄사함의 덫은 이러한 것들이 아닙니다. 습관적으로 범하는 것들, 바로 잘못하고 있다는 사실도 깨닫지 못한 채 당연하고 그럴 수 있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는 습관의 잘못이 우리의 신앙을 더욱 더 병들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 우리가 정말 회개하는 마음으로 베드로와 같이 아버지의 큰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으로 거듭나기 위하여 다 함께 점검해 봅시다.
1. 먼저, 예배의 생활은 잘 되었습니까?
2008년 여러분의 예배의 생활은 어떠하셨습니까? 예배의 생활이 철저히 지켜졌는지를 돌아보기 원합니다. 구원받은 자에게 있어 예배의 생활은 그 어떠한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중요한 것입니다. 1년 52주, 365일 내가 하나님 앞에 어떠한 모습으로 예배하였는가를 돌이켜 보시기 바랍니다. 많은 것이 있지만 첫째로 한 가지, 예배의 시간을 제대로 지켰는지를 살펴봅시다. 여러분은 예배의 시간에 철저하셨습니까? 오늘도 안타깝지만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배의 시작 전에 예배당을 지키고 있었던 것은 정확히 지금 인원의 절반에 불과하였습니다. 예배가 시작되고 나서야, 나머지 절반의 인원이 예배당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예배에 늦은 사실로 인하여 가슴을 치며 후회하고 회개한 일이 있습니까? 습관적인 지각에 대하여 아무런 가책을 느끼지 않은 채로 지각을 반복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배는 하나님 앞에 너무나도 소중한 것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도 지켜야 하는 예절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 앞에서 지키지 못한 약속에 대해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태연한 것은 무엇입니까? 잘못된 습관입니다. 예배에 대한 우리의 개념이 흐릿해져 있는 것입니다. 예배의 중간에 일어서서 나가는 것에 대하여도 아무런 죄의식이 없습니다.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여러분이 대통령과의 약속이 있어 청와대를 방문한다고 가정해 봅시다. 몇 시간 전에 가시겠습니까? 적어도 3시간 전에는 가야할 것입니다. 이는 대통령이 하나님보다 더 존귀한 존재라고 여러분의 삶으로 고백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예배를 위하여 예배당에 어느 정도 미리 와 있어야 적절하다고 생각하십니까? 3시간 전? 2시간 전? 아니면 1시간 전? 그 무엇도 정해져 있는 것은 없습니다. 다만 예배가 시작되기 전 예배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이 자리에 앉아 계시면 되는 것입니다. 당부 드립니다. 예배가 시작되기 전에 이 자리를 지켜 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예배를 위하여 집을 떠나는 순간부터 여러분의 예배는 시작이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배의 정시간을 맞출 수 있는 시간에 집을 나서는 것 자체가 하나의 예배가 되는 것 아닐까요? 주목하고 싶은 것은 매 주일마다 시작 찬양을 하는 도중, 혹은 사도신경의 고백이 끝난 후에, 아니면 대표기도의 시간이 되어서야 예배당에 들어서는 성도들은 늘 같습니다. 마치 일부러 그 시간이 되기를 기다려서 들어오는 것 마냥 지각하는 시간은 정해져 있습니다. 이 사실은 매주 반복되는 지각이 부득이한 사건과 사고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무의식적으로 범해지는 잘못된 습관의 결과라는 것을 반증합니다. 물론 예배 시간 전에 도착해서도 예배가 시작되고 나서도 예배당에 들어오지 않고 1층에서 서성이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배를 준비하는 마음가짐이 허술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예배에 있어 사모함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예배 시간을 지키지 못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잘못을 잘못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더 위험한 일입니다. 예배에 대한 잘못된 개념에는 또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주일의 예배는 오전 예배에서 끝나는 것 입니까? 아닙니다, 여러분. 주일 오전 예배와 오후 찬양 예배는 내용과 방식이 다릅니다. 매 예배의 시간 시간마다 사모함과 갈망으로 나오시기를 바랍니다. 예배가 바로 서지 않으면 신앙이 바로 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배의 생활이 철저히 지켜져야 합니다. 또한 바로서야 하는 예배는 이것뿐 만이 아닙니다. 교회에서의 공예배가 끝난 후 각자의 생활의 터전으로 돌아가서 시작되는 각자의 예배가 있습니다. 각자의 예배의 삶에 반드시 수반되어야 하는 것은 말씀의 묵상과 큐티입니다. 성경 읽으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말씀을 통하여 나에게 전하시는 주님의 메시지를 받아 들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적인 예배는 24시간 우리의 의식 속에서 지속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말씀 속에서 늘 깨어져 있는 것으로 유지해야 합니다.
2. 다음으로 헌금 생활은 잘 되었습니까?
믿음의 사람에게 헌금 생활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배에 있어 불가결한 것이 헌금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앞에 드려지는 예배에 예물이 결여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한 까닭에 예물의 성질, 즉 어떠한 예물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왔느냐는 중요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의 정성과 뜻이 담겨져 있는 예물이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따금 여러분의 예물을 보면, 진정 주님 앞에 나오는 마음가짐에서 준비된 것인지를 생각게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지난 주에 있었던 성탄절 예배에 참석한 46명의 예배자가 준비한 헌금의 총액은 10만 6384엔이었습니다. 물론 일본에서의 성탄절은 평일이기 때문에 직장인들은 많이 출석할 수 없었고, 유학생들로 대부분 이루어져 있는 교회의 구조에 비추어 볼 때 적은 액수라고는 말할 수 없으나 그 내역을 들여다 볼 때 과연 여러분들의 헌금을 드리는 모습에서 예배의 중심, 경배의 중심이 바로 서있다고 볼 수 있을지의 여부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10만 6384엔 중 사역자 가정에서 준비한 5만엔의 헌금과 한 형제의 만엔의 헌금을 제외하면 일인당 평균 헌금액은 1000엔 정도가 됩니다. 성탄절의 의미를 알고, 감사의 의미를 알면서 이러한 예물을 준비한 것인지, 행여나 목사인 제가 성탄절 감사의 의미를 올바로 전달하고 교육하였는지에 대하여 다시 한번 깊이 반성하였습니다. 동방박사들은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하여 강을 건너고 험준한 산을 지났습니다. 위험한 광야를 지나고 낮의 더위와 밤의 추위와 싸우며 황금과 유황과 몰약을 들고 아기 예수를 찾아갔습니다. 그 예물의 중심에는 진정과 진심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가장 아끼고 자신에게 보물이라고 여겨지는 소중한 물건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아갔습니다. 내 보물이 있는 곳에 내 마음이 있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현대에 있어 물질이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는 점에서 물질을 현대형 보물이라는 점은 부인하기 힘들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드려지는 예물의 모습을 살펴볼 때 과연 주님께서 나를 대신하여 나의 죄를 짊어지시고, 나를 구원하기 위하여 오신 기쁘고 감사한 절기에 드려짐에 적합한 예물인 것인가에 대하여 생각해 보게 됩니다. 교회의 절기는 신년감사, 부활절 감사, 맥추 감사, 추수감사, 성탄절, 교회 설립 기념 이렇게 크게 6개로서, 대략 2달에 1회의 빈도로 우리는 절기를 지키고 있습니다. 이러한 절기의 합당한 예물의 액수에 대하여는 여러분께 이미 말씀드렸던 바와 같이 십일조가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십일조가 가지는 의미상 그것이 경배와 감사의 가장 적당하고 지표가 되는 금액으로 드려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2000년 전 예수님이 탄생하신 때와 동일한 감동과 감사에 대한 마음이 지금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니 오히려 우리에게 그 감동은 더 크게 와 닿아야 하는 것은 아닙니까? 요한 위슬레는 지갑이 헌신되지 않은 사람은 여전히 자신을 헌신하지 못한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 헌신한다는 말 뿐으로, 자신의 지갑을 열지 않고 자신의 마음을 열지 못하는 사람은 주님 앞에 어떠한 사명도 감당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예물에 비쳐진 우리의 신앙 생활의 모습이 열의와 열정을 잃어버린 채 껍데기만 있는 한낱 표면적인 것은 아닌가 돌아보게 합니다. 감사절에 드려진 헌금 중에는 12엔이 들어있는 헌금봉투가 있었습니다. 결코 적은 금액이라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15엔이 있는 사람이 12엔을 냈을 리는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흡족해 하신 과부의 2렙돈과 같이 그는 자신의 부족한 중에서도 드릴 수 있는 전부를 주님 앞에 헌신하였을 것입니다. 주님은 그 자의 예물을 가장 기쁘게 받으셨을 것입니다. 물질의 양의 문제가 아닌, 우리의 전부를 드리고자 하는, 주님이 합당하게 복되게 받으실 수 있는 그러한 헌금의 생활을 하시기 바랍니다.
3. 또한 기도와 전도의 생활은 잘 되었습니까?
여러분, 기도 하고 계십니까? 매 주일, 중보기도팀은 예배 전 1시간 반부터 1시간 가량을 예배를 위한 기도를 하고, 매 주 한 시간씩 릴레이 기도와 개인 기도를 통하여 적어도 3시간 이상씩 중보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기도는 신앙생활 가운데 왜 중요할까요? 그것은 기도가 주님을 닮은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주님도 늘 기도와 함께 하셨습니다. 우리도 기도로서 주님 앞으로 나아가야만 우리의 신앙이 살 수 있습니다. 특히, 기도와 전도를 함께 묶은 이유는, 기도와 전도는 언제나 같이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늘 영혼의 구원을 위하여 밤새 기도하시고, 일어나 유대 전역을 다니시면 잃어버린 영혼을 붙잡아 주 앞에 세우셨습니다. 기도를 하면서 전도를 하지 못하면 신앙이 병들기 쉽습니다. 기도의 결실로 전도를 맺어내지 못하면 그의 신앙은 교만의 병에 걸릴 수밖에 없습니다. 기도는 응답이라는 열매를 맺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는 것이므로, 그 기도가 결과를 내지 못한다면 기도의 방식과 내용에 의문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의 2008년 새가족 등록 교인은 총 82명이었습니다. 단순한 여행과 방문의 목적이 아닌 교회 등록의 의사를 가지고 새가족이 되었던 인원의 수라는 점을 감안할 때 적지 않은 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중 우리 교인이 직접 전도하여 인도한 새가족은 놀랍게도 5퍼센트 미만에 불과합니다. 나머지는 모두 스스로 방문하고 스스로 떠나가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현실은 지금 우리의 신앙의 삶 속에 커다란 문제점이 있다는 뜻입니다.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이끌어 내지 못하는 신앙은 죽어있는 것과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죽어가는 한 영혼을 바라보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영의 눈이 멀어 있는 것입니다. 안타까운 영혼이 나를 향하여 도움의 손짓을 하고 있는 것을 전혀 보지 못하고, 다만 세상적인 관계와 피상적인 관계에 만족하고 일터와 배움터에서 만나는 많은 영혼을 구원의 대상으로 바라보지 못합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만나는 관계는 그저 우연한 것이 아닙니다. 단순히 사업을, 친교를 위하여 어쩌다가 만나게 된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만남과 관계는 모두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복음이 건너가게 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에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러한 모든 영적인 기회와 은혜를 모두 놓치고, 죽어가는 영혼에 대한 안타까움과 영혼 구원에 대한 갈망을 잃어버린 채 건조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불 속에 들어가 있는 사람을 보고도 그렇게 덤덤하게 계실 수 있습니까? 금방이라도 영원한 지옥불에 던져질 그 영혼에 대하여 애타고 가엽게 생각하기 위해서는 기도와 전도의 문이 동시에 열려야 하는 것입니다. 나를 통하여 영혼이 구원받을 때 나의 영혼이 더욱 생명을 얻고, 나의 상급이 풍성해 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늘의 부자 되시기 바랍니다. 베드로와 같이 수많은 영혼을 살려 낼 수 있는 그러한 사역을 감당할 수 있는 강건한 영혼 되시기 바랍니다.
4. 마지막으로 섬김의 생활은 잘 되었습니까?
이 부분 또한 안타깝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만일 우리가 섬김의 생활을 충실히 했었다면 올 한해 등록했던 80여명의 새가족 중 절반은 우리 곁에 남아 신앙생활을 함께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전부까지는 바라지 않더라도 절반 정도의 새가족은 머물게 되지 않았을까요? 우리 주님은 평생을 고아와 과부 등 불쌍하고 버림받은 이들을 섬기는데 사용하셨고, 마지막의 순간에는 당신의 생명으로까지 우리를 섬겨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분을 섬김의 왕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주님께 섬김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 안에 그 섬김이 재현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사랑에 감격하지 못한 것이고 감사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며칠 전 어느 목사님으로부터 엄청난 양의 빵과 쿠키를 선물로 받아, 필요한 모든 사람이 자유롭게 가져가도록 아래층에 배치해 놓았습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가요? 받았기 때문에 줄 수 있는 것입니다. 그저 받은 것이기 때문에 그저 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주님으로 받은 섬김에 대하여 대가를 치뤘습니까? 아닙니다. 우리의 행위와는 전혀 무관하게 주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고 헤아릴 수 없는 사랑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우리가 받은 따뜻한 사랑과 영원한 생명에 대한 감격을 우리 안에 가지고 있음에 그치지 말고, 또다른 영혼을 섬김으로써 전달하여 새로운 생명을 구원하는데 사용해야 합니다. 2009년 사역에 대한 자원신청에 대하여 많은 분들이 섬김을 자원하여 주셨지만, 개인적으로 꼭 있었으면 하는 섬김 분야에 신청이 없었습니다. 그것은 주일의 예배 시간 전에 전철역에서부터 교회에 도착하기까지의 길목에 교회 안내 표지판을 들고 있는 길 안내 사역입니다. 매 주일 예배마다 교회의 위치를 잘 알지 못해서 허둥대다가 예배시간을 놓치는 방문자들이 있습니다. 그러한 방문자에게 이정표의 역할을 하고 조금이라도 편히 예배당으로 안내할 수 있는 그러한 사역자가 있으면 그들에게 얼마나 따뜻한 도움이 될까요? 방문자를 대하는 태도도 그렇습니다. 처음 방문하신 분들을 향한 애정과 관심이 부족하다는 것은 몇 차례 지적한 바 있습니다. 아무도 말 붙여 주는 사람이 없는 어색하고 불편한 상황에서 방문자로 하여금 다만 그 자리에서 빨리 벗어나가 싶게 만드는 것이 우리의 태도 아닙니까? 예수님께 받은 사랑을 베풀고, 그 마음가짐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섬김은 결코 크고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화장실에서 거의 다 떨어진 휴지를 갈아 끼워 놓는 것, 다른 이의 입장과 편의를 한 번 더 배려할 수 있는 마음, 그것이 섬김의 시작입니다.
2008년 우리가 저질렀던 사소하지만 결정적이고 기본적인 잘못을 되돌아 봅시다. 이것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2009년도 2010년도 습관적으로 잘못을 반복함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본문의 두 사람을 생각해 봅니다. 똑같이 잘못하고 똑같이 울며 후회했습니다. 용서받지 못할 죄를 저질렀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 후의 그들의 인생은 커다란 차이가 있었고, 그 차이에는 철저한 회개가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잘못을 전혀 깨닫지도 못했었지만, 새벽의 닭 울음소리에 잘못을 깨닫고 통곡하였습니다. 우리도 우리의 신앙생활 속에서 늘상 범해졌던 잘못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이 시간 주님의 성령의 목소리로 깨달았을 줄로 믿습니다. 그 깨달음에 회개가 수반된다면, 우리 역시 베드로와 같이 다시 일어서 예배와 헌금과 기도와 섬김의 삶을 회복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렇게 회복되어 주님이 주신 아름다운 사명을 끝까지 감당할 수 있는 주의 백성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