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의 흐름에 따라 원래의 성격과 기능에서 멀어지고 전혀 다른 의미를 갖게 되거나 다른 용도로 사용되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한 예로 이발소의 안내등을 들 수 있는데, 그 등은 붕대를 의미하는 하얀색과 정맥을 의미하는 파란색, 그리고 동맥을 나타내는 빨간색으로 이루어져 있어 예전에는 이발소가 이발만을 목적으로 하는 공간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게 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이 표시는 이발소의 전용표시만으로 사용되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이발소의 등이 가지는 의미는 점차 변화되어 이발소 등의 개수에 따라서 주된 업종의 성질이 달라지기까지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의미의 변천의 또 다른 예로서 ‘적당하다’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이 말의 본연의 뜻은 정도에 알맞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가 식민시대와 산업시대를 겪으면서 우리는 보다 많은 노동력을 요구받게 되었습니다. ‘정도에 알맞는 적당함’은 기대치에 미치지 못하는 부정적인 의미를 가지게 된 것입니다. 알맞음보다도 최선을 다해 더 많은 것을 달성해내야 하는 사회에서 적당함이란 형편에 맞게 대충 하는 것으로서 부족함을 의미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등장하는 ‘형제’라는 단어도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의미와는 다소 다름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사도바울이 사용하는 형제와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형제는 서로 다른 개념으로 와 닿는다는 것입니다. 두 용어가 모두 교회 안에서 함께 하는 믿음의 형제를 지칭함에도 불구하고, 내용적으로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도바울이 사용한 형제의 개념이 어떠한 것인지를 살펴봄에 의하여 은혜 받을 수 있는 시간을 가지길 원합니다.
1. 형제는 미움이 아닌 사랑의 대상입니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자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14-15절)
구원의 기준은 무엇입니까? 무엇으로 구원 받으셨습니까? 믿음입니다. 예수를 믿음으로써 우리는 구원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은 본문에서 형제를 사랑함에 의하여 구원받는다고 하고 있습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들어갈 수 있게 하는 것은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분명히 말하며 구원의 증표가 형제사랑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내가 형제를 미워한다면 영생은 내 안에 존재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요한의 말은 그릇된 것입니까? 요한이 말한 것은 구원 받은 자의 모습에 대한 설명입니다. 자신이 믿음으로 고백으로 구원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형제를 미워하고 마음으로 사랑하지 못한다면, 내가 진정 예수를 구주로 모셨는지를 다시한번 생각해 보지 않으면 안된다는 뜻입니다. 즉 구원의 필연적인 결과로서 형제를 사랑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믿음 안에서 형제를 사랑하고 계십니까? 내 구원의 증표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형제를 사랑한다고 자신있게 고백할 수 있습니까? 자신이 구원 받았다는 사실에 대하여는 자신하면서 형제 사랑에 대하여는 머뭇거리지는 않습니까? 요한은 이를 별개의 것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예수를 구주로 인정하고 구원받은 사람은 형제를 사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내 형제의 태도에 따른 상대적인 사랑이 아니라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인 사랑이므로, 나는 절대적인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그리스도의 자녀인 형제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사도요한이 말한 형제사랑은 구원의 기쁨과 감격, 매우 강력한 은혜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초대교회는 바로 이러한 넘치는 은혜 속에서 하나 되었다고 보여집니다. 우리 동경한인장로교회도 이와 같이 미움이 아닌 사랑으로 하나되는 교회가 되길 원합니다.
2. 형제는 호칭이 아니라 관계의 대상입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16절)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을 당연하다고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요한은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을 마땅하다고 하고 있지만, 우리의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요한이 말한 형제는 피를 나눈 형제가 아닌 우리와 마찬가지로 믿음 안의 형제입니다. 그렇다면 요한이 말하는 죽음은 이상적인 사상을 바탕에 둔 것입니까? 아닙니다. 요한이 당연시하는 형제애는 지극히 현실적일 것을 요합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결과적인 모순이 나오는 것은 이러한 명제들 중 어느 것에 오류가 있다고 해석할 수 밖에 없는데 그 오류는 무엇일까요?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버린 사실이 잘못된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원인적 사실과 우리가 형제를 위하여 죽어야 하는 당위성에는 오류가 없으나 그 중간에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았다’는 단계에서 문제점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가 구원으로서 얻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잘못 이해하고 있습니다. 머리로는 알지만 내 몸을 움직이는 마음으로는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나를 위하여 죽은 그 사실을 그저 지식의 하나로서만 받아들일 뿐, 내 삶을 변화시키고 행동의 결과를 내야 함까지는 미치지 못하는 정도에 머물러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형제라는 단어는 관계를 지칭하는 용어이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를 그저 호칭으로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요한의 형제는 그리스도의 피로서 맺어진 그 분의 구속과 사랑으로 형성된 관계 안의 사람이지만 우리가 가지는 형제의 개념은 단지 상대방을 부르기 위한 호칭에 지나지 않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러한 상대를 위하여 죽을 필요성, 당위성에 대하여 납득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마지막 시대에 사탄이 개념을 흐릿하게 만드는 용어에는 이외에도 여러가지가 있는데 그 중에서 목사, 장로, 권사, 집사, 성도 등의 직임을 나타내는 용어들 역시 직임, 역할을 의미하기 보다는 단순한 호칭으로만 사용되는 것을 봅니다. 바랍니다. 형제는 부르기 위한 호칭으로 쓰여져서는 안됩니다. 이는 예수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하나됨을 놓쳐서는 안됩니다. 이 관계를 붙잡고 놓치지 않은 요한에게는 형제를 위하여 죽는 것이 당연한 일로서 받아들여졌던 것입니다.
3. 형제는 외면이 아닌 관심의 대상입니다.
누가 이세상 제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 보냐(17절)
형제 사랑은 물질의 위에 있어야 합니다. 현대 사회는 어떻습니까? 형제들 간에 심한 재산 분쟁으로 연락조차 끊고 사는 것을 많이 봅니다. 물질을 형제보다 중요시하기 때문입니다. 형제사랑을 위하여 요한이 전제하고 있는 것은, 자신이 가진 것을 먼저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의 소유에 대한 파악이 있어야 하고 그 다음으로는 형제의 궁핍, 즉 형제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를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를 도와줄 수 있는 마음을 막지 말아야 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사랑이 전달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질이 전달됨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형제를 사랑하는 마음이 물질을 매개체로 하여 그 형제에게 전달되는 것이기 때문에 물질에 대한 아까움, 소유욕으로 인하여 이를 막아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요한은 18절에서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로 하자’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사랑이 말과 혀에 의한 사랑이며 행함과 진실이 결여된 형식적인 모습인지를 반성해 봅니다. 마지막 때일수록 사랑이 식을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며,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관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우리 안의 사랑은 식지 않고 오히려 뜨겁게 불타오르는 아름다운 불꽃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원래의 성격과 기능에서 멀어지고 전혀 다른 의미를 갖게 되거나 다른 용도로 사용되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한 예로 이발소의 안내등을 들 수 있는데, 그 등은 붕대를 의미하는 하얀색과 정맥을 의미하는 파란색, 그리고 동맥을 나타내는 빨간색으로 이루어져 있어 예전에는 이발소가 이발만을 목적으로 하는 공간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게 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이 표시는 이발소의 전용표시만으로 사용되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이발소의 등이 가지는 의미는 점차 변화되어 이발소 등의 개수에 따라서 주된 업종의 성질이 달라지기까지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의미의 변천의 또 다른 예로서 ‘적당하다’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이 말의 본연의 뜻은 정도에 알맞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가 식민시대와 산업시대를 겪으면서 우리는 보다 많은 노동력을 요구받게 되었습니다. ‘정도에 알맞는 적당함’은 기대치에 미치지 못하는 부정적인 의미를 가지게 된 것입니다. 알맞음보다도 최선을 다해 더 많은 것을 달성해내야 하는 사회에서 적당함이란 형편에 맞게 대충 하는 것으로서 부족함을 의미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등장하는 ‘형제’라는 단어도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의미와는 다소 다름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사도바울이 사용하는 형제와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형제는 서로 다른 개념으로 와 닿는다는 것입니다. 두 용어가 모두 교회 안에서 함께 하는 믿음의 형제를 지칭함에도 불구하고, 내용적으로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도바울이 사용한 형제의 개념이 어떠한 것인지를 살펴봄에 의하여 은혜 받을 수 있는 시간을 가지길 원합니다.
1. 형제는 미움이 아닌 사랑의 대상입니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자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14-15절)
구원의 기준은 무엇입니까? 무엇으로 구원 받으셨습니까? 믿음입니다. 예수를 믿음으로써 우리는 구원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은 본문에서 형제를 사랑함에 의하여 구원받는다고 하고 있습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들어갈 수 있게 하는 것은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분명히 말하며 구원의 증표가 형제사랑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내가 형제를 미워한다면 영생은 내 안에 존재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요한의 말은 그릇된 것입니까? 요한이 말한 것은 구원 받은 자의 모습에 대한 설명입니다. 자신이 믿음으로 고백으로 구원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형제를 미워하고 마음으로 사랑하지 못한다면, 내가 진정 예수를 구주로 모셨는지를 다시한번 생각해 보지 않으면 안된다는 뜻입니다. 즉 구원의 필연적인 결과로서 형제를 사랑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믿음 안에서 형제를 사랑하고 계십니까? 내 구원의 증표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형제를 사랑한다고 자신있게 고백할 수 있습니까? 자신이 구원 받았다는 사실에 대하여는 자신하면서 형제 사랑에 대하여는 머뭇거리지는 않습니까? 요한은 이를 별개의 것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예수를 구주로 인정하고 구원받은 사람은 형제를 사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내 형제의 태도에 따른 상대적인 사랑이 아니라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인 사랑이므로, 나는 절대적인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그리스도의 자녀인 형제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사도요한이 말한 형제사랑은 구원의 기쁨과 감격, 매우 강력한 은혜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초대교회는 바로 이러한 넘치는 은혜 속에서 하나 되었다고 보여집니다. 우리 동경한인장로교회도 이와 같이 미움이 아닌 사랑으로 하나되는 교회가 되길 원합니다.
2. 형제는 호칭이 아니라 관계의 대상입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16절)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을 당연하다고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요한은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을 마땅하다고 하고 있지만, 우리의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요한이 말한 형제는 피를 나눈 형제가 아닌 우리와 마찬가지로 믿음 안의 형제입니다. 그렇다면 요한이 말하는 죽음은 이상적인 사상을 바탕에 둔 것입니까? 아닙니다. 요한이 당연시하는 형제애는 지극히 현실적일 것을 요합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결과적인 모순이 나오는 것은 이러한 명제들 중 어느 것에 오류가 있다고 해석할 수 밖에 없는데 그 오류는 무엇일까요?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버린 사실이 잘못된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원인적 사실과 우리가 형제를 위하여 죽어야 하는 당위성에는 오류가 없으나 그 중간에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았다’는 단계에서 문제점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가 구원으로서 얻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잘못 이해하고 있습니다. 머리로는 알지만 내 몸을 움직이는 마음으로는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나를 위하여 죽은 그 사실을 그저 지식의 하나로서만 받아들일 뿐, 내 삶을 변화시키고 행동의 결과를 내야 함까지는 미치지 못하는 정도에 머물러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형제라는 단어는 관계를 지칭하는 용어이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를 그저 호칭으로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요한의 형제는 그리스도의 피로서 맺어진 그 분의 구속과 사랑으로 형성된 관계 안의 사람이지만 우리가 가지는 형제의 개념은 단지 상대방을 부르기 위한 호칭에 지나지 않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러한 상대를 위하여 죽을 필요성, 당위성에 대하여 납득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마지막 시대에 사탄이 개념을 흐릿하게 만드는 용어에는 이외에도 여러가지가 있는데 그 중에서 목사, 장로, 권사, 집사, 성도 등의 직임을 나타내는 용어들 역시 직임, 역할을 의미하기 보다는 단순한 호칭으로만 사용되는 것을 봅니다. 바랍니다. 형제는 부르기 위한 호칭으로 쓰여져서는 안됩니다. 이는 예수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하나됨을 놓쳐서는 안됩니다. 이 관계를 붙잡고 놓치지 않은 요한에게는 형제를 위하여 죽는 것이 당연한 일로서 받아들여졌던 것입니다.
3. 형제는 외면이 아닌 관심의 대상입니다.
누가 이세상 제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 보냐(17절)
형제 사랑은 물질의 위에 있어야 합니다. 현대 사회는 어떻습니까? 형제들 간에 심한 재산 분쟁으로 연락조차 끊고 사는 것을 많이 봅니다. 물질을 형제보다 중요시하기 때문입니다. 형제사랑을 위하여 요한이 전제하고 있는 것은, 자신이 가진 것을 먼저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의 소유에 대한 파악이 있어야 하고 그 다음으로는 형제의 궁핍, 즉 형제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를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를 도와줄 수 있는 마음을 막지 말아야 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사랑이 전달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질이 전달됨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형제를 사랑하는 마음이 물질을 매개체로 하여 그 형제에게 전달되는 것이기 때문에 물질에 대한 아까움, 소유욕으로 인하여 이를 막아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요한은 18절에서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로 하자’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사랑이 말과 혀에 의한 사랑이며 행함과 진실이 결여된 형식적인 모습인지를 반성해 봅니다. 마지막 때일수록 사랑이 식을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며,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관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우리 안의 사랑은 식지 않고 오히려 뜨겁게 불타오르는 아름다운 불꽃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