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글:김용수(写真 ·文:金ヨンス)
21세기를 살아가면서 100년 전 선조들이 살았던 삶의 모습을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은 불편을 넘어 큰 행운이자 복일 것이다. 그런데 교회가 치바로 내려온 후에는 감사하게도 가끔 그 복을 누리게 된다.
솥을 거는 아궁이의 형식만 바뀌었을 뿐 나무로 불을 지펴가며 주일에 믿음의 식구들이 함께 먹을 닭을 구수하게 삶는 중에 현대의 삶과 1세기 전의 삶의 차이를 아궁이 앞에서 생각해 본다.
지금은 많은 부분의 음식을 가전제품으로 만들어 내기도 하지만 직접 가스 불을 사용하여 음식을 조리하는 것은 경우도 많이 있다. 단지 불을 사용하여 음식을 만드는 경우 가스 불을 사용하는 것에 비하여 장작을 사용할 때에 불은 항상 사람을 자신의 앞에 붙잡아 놓는다는 것이다. 음식을 만들기 시작한 시각부터 음식이 완성하는 시간까지 완벽한 동행을 요구한다는 것이 밤의 잠자리에서 오줌을 싸야할 만큼 불놀이를 지극정성으로 해야 했던 것이다.
그래서일까? 옛 음식에는 무엇인가 깊은 맛을 느끼게 했던 지극정성의 맛이 있었다.
바라긴 주일예배 후 함께하는 식탁에서도 100년 전의 깊은 맛을 느끼게 되길 기대해본다.
21世紀を生きながら、100年の前に先祖たちが生きてきた人生の姿を体験できるということは、不便を超えて大きな幸運であり福だろう。 ところが教会が千葉に降りてきた後はありがたくも時々その福を享受することになる。
釜をかけるかまどの形式が変わっただけで、木で火をつけながら、主日に信仰の家族が一緒に食べる鶏を香ばしく茹でる中で、現代の生活と1世紀の前の生活の違いをかまどの前で考えてみる。
今は多くの部分の食べ物を家電製品に作ったりもするが、直接ガス火を使って食べ物を調理することは多くある。 ただ火を使って食べ物を作る場合、ガス火を使うことに比べて薪を使う時に火は常に人を自分の前に捕まえておくということだ。 料理を作り始めた時刻から料理が完成する時間まで完璧な同行を要求するということが、夜の寝床で小便をしなければならないほど火の遊びを真心を込めてし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のだ。
そのためだろうか? 昔の食べ物には何か深い味を感じさせた至極真心の味があった。
願うは主日礼拝の後、一緒にする食卓でも100年の前の深い味を感じることができることを期待したい。